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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의 비의 ③ -김동리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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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리하여 「마리아」와성기의 비극은 극히 인간적인 비극이 된다. 역마민(살)이나 계연의 왼쪽 귓바퀴 위의 사마귀나 사반 어머니의 「칼날같이 좁고 뾰족하게 흘러붙은」귓밥 (수주)등으로 엿뵈는 숙명감에 결코 굴하지 않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초극한다. 근친간죄를 죄 그대로 지니면서 그걸 재생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스스로 눈 먼「외디푸스」왕의 눈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막달라·마리아」와 성기의 앞에도 빛이 보인다. 그전 어스름 속의 핏기없는 모화모녀나 은냇골의 역사들이나 늪의 석에서는 비치지 않았던 인간적인 다수운 빛이다. 또 인간적인 것이야 말로 우위적인 뜻에서 가장 「리얼」한 것이다. 마침내 성기는 엿판을 메고 신생의 길을 떠난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서 있을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갈 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려 가고있는 것이었다.
성기의 이 화갯골 탈출의 콧노래는 인간성의 구가로만 들려진다.

<3 (연화의 세계)>
「역마」에서의 성기와 계연의 근친간은 역마살이 내렸기 때문이다. 모화가 굿을 하다가예깃소에 빠져 죽은 건 김씨부인의 귀신이 씌웠기 때문이요. 황토기의 두 장사가 싸움질을 하는건 쌍룡설때문이요, 「달」의 죽음도 정국의 원혼이 시킨 것이다. 모두 초자연력-운명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동리는 최근작「까치소리」의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자는 역경 주해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착함을 쌓은 집엔 반드시 경사가 남아 끼칠 것이요, 착하지 못함을 재앙이 끼쳐질 것이니>…이와같은 공자의 사상보다 더 폭을 넓혀서 투철하게 보는 것이 불교의 인과설이다…그러니까 나의 적행(혹은 업인)이 내 자손에게 간다고 보기보다 바로 내자신(내생의)에게 돌아올 뿐 아니라, 이승에서 내가 받은 업보는 바로 내전생의 업보일 뿐 아니라 전전생 또는 그보다 더 먼 어느 전생의 것일 수도 있다는 인과설인 것이다…. 』 (현대문학통권144호) 이러한 주제가「까치소리」의 원동력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간속신과 종교는 옛적부터 상호침투되어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샤머니즘」에서의 정령의 전생 빙의와 불가의 인과설은 관계가 없다고 보아도 좋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보면 귀신이 되는 우주만상의 정령은 어느 기간만 지나면 산실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영구한 인과율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샤머니즘」에는 인과설의 윤리적선악관념이 있을 수 없다. 「무녀도」 「달」 「역마」의 세계는 그와같은 「샤머니즘」의 세계이다. 그러나 「까치소리」는 인과율에 따라, 전대의 죄업으로 말미암아 봉수란 주인공이 희생되는 것을 그린 것이다. 봉수는 아무 죄없는 순진한 청년인데 파멸한다. 이는 희랍의 운명비극의 경우와 비슷하다. 아니, 무구한 인간이 쓰러지는 예는「셰익스피어」에도 나온다. 부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효녀「코델리아」는 아버지의 오해를 받는가 하면 하천배에게 죽음을 당한다. 마음이 청순한 「오델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셰익스피어」는「코델리아」나 「오델로」의 비극을 「운명」에 돌리지도 않고, 신의 정의에도 결코 돌리는법 없이 냉엄하게 그려낼 뿐이다. 인간사회에는 그런 기막힌「파라독즈」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동리는 봉수의 어이없는 비극을 인과율로서 처리했는데, 이는 편리할지는 모르나 너무 안이하다. 과연 독자가운데 봉수의 파멸을 인과응보와 결부시켜 읽은 사람이 있을까?
동리의 자작해설을 본 뒤에 읽어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독자는 까치소리와 어머니의 기침소리에서 불길한 운명의 전조(분위기)를 막연히 느낀데 그쳤을 것이요, 이것도 「무녀도」나 비슷한 경향의 소설이라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리의 인과율은 그 현대적 의의는 물론 창작방법논적 의의에 있어서도 공전할 수밖에 없다.
동리는 그러나 그와 같은 운명의 여신으로부터 종종 이유를 꾀한다. 그리하여 침침한 늪지대를 떠나 오늘의 현실, 오늘의 시정에 나온다. 「혼구」「인간동의」「흥남철수」「실존무」「귀환장정」등 적잖은 작품을 썼다.
「혼구」(1940)와 「인간동의」(1960)는 소시민의 의식세계를 추구하고 있어 흥미롭다. 아버지한테 몰지각한 학대를 받는 송학숙의 처지를 두고 담임선생으로서의 책임감때문에 괴로워하는 강정우나, 정신적으로 화합될 수 없는 아내와 지애 (애인) 의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는 장익은 둘 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딜레마」에 빠진다. 문제의 방향과 해결책은 확실하다. 그러나 원래 직선적인 의지력이 약할 뿐 아니라, 사회전체면 (강정우)이나 가족적유대 (장익) 를 부고할만한 배짱도 없다.
특히 강정우의 경우에는 이따금 이성의 「콘트롤」이 듣지않는 의식과 무의식의 혼미가 빚어진다. 『19세기의 인간은 성격이 없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실생활자의 수기」에서 토로했는데, 이건 애초 성격이 없다는게 아니라 성격적 모순의 과잉이나 분열증에서 오는 무성격이라 한다면 강정우도 이런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강정우의 지성은 예리하고 투철한게 아니라 어딘지 안개처럼 흐리다. 여기 비하면 장익은 훨씬 지적이다. 그러나-「장르」가 단편인 탓이겠지만 - 그들의 도덕적 갈등은 도저하지 못하고 끝나버린다. 이는 「사반의 십자가」의 「유다」나「실존무」의 주인공들의 경우도 매한가지이다. 그들에게서는 저 자의식마저도 객관화시켜볼 수 있는 바탕이자 계기인 타자 (혹은 자기내부의 악마, 분신) 에 의한 의식의 분열혼돈 - 이건 치열한 인식욕에서 오지만 - 을 기대하기 어렵다.
「흥남철수」의 배경은 전란의 거의 최전방이다. 종군문화반이 대민선무에 종사하는 도중 중공군의 침입으로 난민들과 함께 철수하기까기의 경과가 시인 철의 시점을 빌어 펼쳐간다. 한강후퇴와 철수가 벌어지고 있을 때 철은 자신의 문제로 불안하다. 전란통에 처자를 앗기고 흥분에 못이겨 성급히 종군한 것이나, 더우기 철수자 번호표를 남에게 양보해버린 사실이 값싼 감상이 아니냐는 타산적 반성에 사로잡혀 괴로와하는 것이다. 이 때 전기가 온다. 그는 뜻밖에도 한 여인의 간절한 요구에 부닥친다. 바로 자신이 임시 숙박하고 있는 집의 큰딸, 간질병자인 윤수정이 자기도 『이남 가서 병 고치고 살고 싶다』고 호소해온 것이다.
수정의 이 한마디 말은 그 순간 철을 흥분시키기에 족하였다. 그는 조용히 수정에게로 접근하여갔다. 한쪽 손으로 수정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손을 그녀의 어깨위에 얹은 뒤, 그는 간질같이 창백한 향기에 젖은 신비로운 꽃송이가 피어나는듯한 그녀의 두 눈을 한참동안 말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이와동시 철의 극도에 달했던 초조와 불안은 고비를 넘기 시작하였다. 자기는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돌아가는데도 우선적인 대우를 받아야 할것같이 생각하던 자기본위의 생각을 버리고, 여기있는 수십만의 자유국민들이 모두 그와 동행이요, 그와 운명을 같이해야할 사람들이다 생각하면서부터 철의 가슴은 한결 가벼워짐을 깨달았다.
우유부단하던 철이, 이런 윤리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윤지숙-전란의 북새통에 핀 한떨기 「신비로운 꽃」 은 비단 조국의 자유와 동포애의 숭고한 「휴머니즘」을 위해서만 중요한게 아니라, 실은 그 못지않게 철 개인의 내부를 위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전후의 행문과는 이질적인 저시적인 행문이 살아나질않는다. 말하자면, 지숙은 계시의 빛이었다. 자기외적인 상황에의 결단과 동시에 섬광처럼 꿈의 .여인상을 드러내준것이다.
이 작품보다 전에 나온 「달」이나 「역마」 그리고 「사반의 십자가」를 읽은 독자는 그「신비로운 꽃」이 바로「흰 연화」임을 「케치」했을 것이다. 동리에 있어서 꿈의 여인상은 이 연꽃으로만 모습을 비치는 것이다.
이튿날 밤도 그들은 (달과 정국) 또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만났다. 정국의 연꽃같이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어젯밤보다 더 황홀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달」)
함라 적삼에 가는 삼베치마를 갈아입고 나오는 계연은 그 선연한 두 눈의 흰 자위 검은 자위로 인하여 물에 어린 한송이 연꽃이 떠오는 듯 하였다.
아직 소녀인 정국이나 계연이 좀더 성장한 모습이 지숙일 것이다. 「지드」도 「도스토예프스키논」에서 강조했지만 외부의 사건은 그게 전쟁같은 혹독한 것일지라도 개인 (작가) 의 영혼의 심부는 다칠 수 없다.
다친다해도 사소한 정도이다. 아니, 그런 외부사건이 치열하면 할수록 그의 영혼내의 깊은 꿈은 금강부괴일 것이다. 「모짜르트」는 어려서 들은 한 아름다운 묘음에 홀린 나머지 평생을 그 음을 탐구하려 했고, 그의 전작품은 그 추구과정이였다고 하지만, 동리의 심혼에 아로새겨진 주선율은, 빛은 어쩌면「어딘지 연꽃같은 처절한 슬픔이 서린 아름다운 여인」 (막달라·마리아)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선 철은 집요하게도 그전란통의「륙색」속에 그「아름다운 눈」을 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으그그그그…」이작품의 전쟁물로서의 속성은 이 윤지숙의 절망적인 간질발작의 기성에서 좌절된다. 포성은 뚝 멎는다. 그대신 소롯하게 피어나는 연꽃…「흥남철수」는 그「엘·에스·티」수송선을 에워싼 감동적인 종말에도 불구하고 결국 작자의 내밀히 계산된 「에고이즘」의 회상록인 것이다. 내란은 차라리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달」이나 「역마」의 벽촌에서 그와는 상황이 딴판인 「흥남철수」, 아니 「유다야」의 아열대에까지 끌려간 그 연꽃은 그보다 약 10년 후에 다시 제 고장으로 돌아온다. 곧「까치소리」이다. (거의 8년에 걸쳐 익어나온 「까치소리」의 「모티브」는 이미 인용한 자작해설에 의하면 인과율에 있었다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
먼저 이소설은 어중간한 심리기구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봉수의 심리기구가 어중간하기 때문이다.
봉수는 대개의 동리소설의 주인공처럼「소피스티케이션」이 전혀없는 청년이다. (그의 우직한 전쟁관이나 전우관을 보라) 게다가 까치소리의 속설을 맹종하는 건 아니나 그렇다고 그걸 냉정히 비판-부정해버릴만한 지성이 있지도 않다. 이럴 경우 봉수같은 단순한 인간은 충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쉽다. 그리고 한번 일어난 충동은 강박관념으로 울적될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구 봉수야, 날 죽여다오>하고 부르짖는 것은, <오! 하느님, 사람 살려주>하는 것의 역표현이라기 보다도 진한 표현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도 말한대로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러한 어머니를 죽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도 어쩌다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처음 한번 그런 일이 있고부터는 줄곧 그렇게 돼버린 것이다. 까치가 까작 까작 까작하면 어머니는 쿨룩 쿨룩 쿨룩을 터뜨리는 것이오, 그와 동시 나의 눈에는 야릇한 광채가 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봉수의 비극은 상호라는 중학동창이 봉수의 전사통지서를 조작하여 봉수의 애인 정순과 위계결혼을 해 버린데서 발단된다.
봉수는 정순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하여, 곧 정순의 운명 속에 자기를 온통 투영해왔기 때문에, 정순과의 일이 뜻대로 안되자 절망에 빠져「실신한 듯이」집 뒤의 보리밭으로 헤매어 가다가 때마침 울어대는 까치소리에 말려들어 충동적으로 파멸한다. 상호의 여동생 영숙을 목졸라 죽이기 때문이다.
(너도-영숙을 가리킴-슬프다는 거냐? 나하고 슬픔을 나누자는 거냐?)…(오빠-봉수-제발, 죽지 마세요. 제가 사랑해 드릴께요. 오빠를 위해서 오빠의 도움이 될수 있다면, 오빠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영숙의 굳게 다문 입속에선 이런 말이 감돌고 있는듯했다.
영숙을 정순의 대용물로 생각하려하는 봉수의 의식은 이처럼 정순의 운명을 축으로 해서 돌고 있다. 그만큼 그는 정순에게 동화돼 있었던 것이다.
정순은 그의 삶의 빛, 모든 것이었다. 이건 몇년만에 겨우 정순을 만났을 때의 묘사를 봐도 알수 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니 정순이, 아, 어느 꿈결에서 보던 설운 연꽃같은 얼굴을 내밀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의 어디가 어떻다는 것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다만 저것이 정순이다. 저것이 아, 설운 연꽃같은 그것이다. 하는 섬광같은 것이 가슴을 때리며 전신의 피가 끓어오름을 느낄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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