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SNS 폭로, 갑·을 관계 틀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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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유업 김웅 대표(앞줄 오른쪽 둘째) 등 임직원들이 9일 오전 브라운스톤서울에서 ‘영업사원 막말’과 ‘밀어내기’ 등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 대표는 이 자리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련의 사태에 대해 회사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뉴시스]

김웅(60) 남양유업 대표이사는 9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환골탈태의 자세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1분 남짓 사과문을 읽는 동안 그는 세 번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이 회사 영업사원이 재고를 대리점 주인에게 떠넘기는 ‘밀어내기’를 하며 욕설과 막말을 한 녹취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공개된 지 6일 만이다. 남양유업은 대리점 지원금을 25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늘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러나 대리점피해자협의회는 “진정성이 없는 사과”라고 일축했다.

 숨죽이고 있던 을(乙)이 들고일어났다. SNS를 통한 폭로와 여론 호소를 통해서다. 물의를 빚은 기업은 사장이 직접 나와서 머리를 숙였다. 불공정 거래 감시·개선 등 진작 했어야 할 제 일을 SNS에 내준 국회와 정부는 뒤늦게 부산하다.

커진 을의 목소리는 변화를 만들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8일 우유업계의 밀어내기 관행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CJ대한통운은 택배기사의 열악한 근무환경 등에 대한 비판이 SNS를 통해 퍼지고, 일부 기사가 운송 거부에 들어가자 “연말까지 기사 수익을 40% 이상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현대백화점은 10일부터 계약서에 ‘갑(甲)’과 ‘을’ 대신 ‘백화점’‘협력사’를 쓰기로 했다. 말만 바꾸는 게 아니라 협력사 고충을 듣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국회에는 하도급법·가맹사업법 등에 대한 개정안이 쏟아지고 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민주화 바람으로 과거 관행에 대한 약자의 비판적 목소리가 커졌다”며 “50∼60대와 달리 권위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20∼30대는 이런 목소리에 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분석했다.

 을의 SNS 폭로는 기존 제도와 담당 부처가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더 큰 파장을 일으킨다. 밀어내기 관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공정위는 문제가 커지고서야 조사를 확대했다. 가맹사업법 등이 있지만 여전히 가맹점주들은 본사의 인테리어 강제 교체 등의 압박에 시달린다. 그만큼 법이 허술한 셈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정위가 물가 잡기 등에 동원되면서 본업인 불공정 거래 단속, 경쟁 촉진에는 소홀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SNS를 통한 을의 반란은 법치를 흔들기도 한다. 현대 법치국가의 근간은 관습에 의한 형벌을 금지하는 것이다. 승무원을 폭행한 이른바 ‘라면 상무’는 직장을 잃었고, 가족의 신상까지 인터넷을 통해 유포됐다. 호텔 지배인 뺨을 때린 제빵업체 회장의 폐업 선언으로 이 업체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SNS에 뜨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순식간에 악덕 기업이 된다”며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져도 여론 재판이 끝난 후라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경제·사회적 약자인 을의 반란이, 여론의 약자인 ‘또 다른 을’을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위기관리 컨설팅 전문기업 스트래티지샐러드의 송동현 부사장은 “남의 신상을 털고 잘못을 마음대로 재단하면 결국 모두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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