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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에 종전공작|22년만에 발견된 근위 전 일 수상의 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8일은 일본군의 진부만 기습으로 이른바 태평양전쟁이 터진날이지만 전후 전범으로 지명되어 45년12월16일 음독자살했던 전수상 근위문마공작의 일기가 종전 22년만에 우연히 발견되어 화제-.
「근위일기」는 44년 6월 「말리아나」해전에서 패배한후부터 일부 중신과 황족들이 당시 독재권력을 한손에 쥐고있던 동조육군대장을 수반으로하는 전시내각을 타도하고 종전·화평의 비밀공작을 펴고 있던 사실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어 귀중한 사적자료가 되고 있다.
일기와 함께 그의 친필 사표문도 발견되었는데 이 비록들은 일본우반 회사 직원인 능속선홍(45)씨의 자택에 비장 되었던 것.
능속씨는 3년전에 세상을 떠난 망부의 서재에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혼에 넣었다.

<우반회사원 집서 자필 사표도 발견>
일기는 만년필로 값진노트 74장에 걸쳐 빽빽이 씌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빨간 연필로 짓거나 첨가한 곳이 있었다.
또한 이 일기는 근위수상이 구술하고 당시 비서였던 친옥무수(46년 사망·당시 59세)씨가 받아쓴 것이 뒤에 밝혀졌다. 그러나 사표문은 그의 자필서인 것이 분명했다.
『「말리아나」해전이래 전국은 극히 우리측에 불리해서 상 하 할 것 없이 우수의 빛이 짙다. 특히 천황은 물론 중신들의 이에 대한 고심 초사는 말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패전의 기운 짙던 44년 7월에 시작>
패전의 낌새가 짙던 44년 7월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의 서두이다.
그리고 대신회의에서 「말리아나」해전에 대한 동조수상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전황보고가 없음을 지적하고 이 자리에서 해군대신이며 전 수상이었던 강전계개씨가 『수상, 참모총장 겹임을 그만둘 생각은 없는가』고 질문한데 대해 동조수상이 묵살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일기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44년 여름 근위 자신이 전쟁 종결을 구상한 것으로 45년 2월 14일 천황에게 그의 소신을 피력한 상소문의 사본이 남아있는 것이다. 근위 수상은 44년 7월 2일 송평대신 비서관장을 통해 목소행일내상에게 보내졌으며 전문은 일기장 6장을 메우고 있다.
그 구상은 『동조수상과 도전 해군참모총장으로 하여금 암담한 전세를 시인케 하려면 천황이 직접 서면으로 이들을 추궁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 줄 믿는다』고 말하고 육군당국이 시인하고 있는 「패전필지」를 누가 감히 공언하겠는가고 되어있다.

<동조에 패전 책임 후임엔 천황동생>
그리고 패전의 모든 책임은 동조한 사람에게 지우고 수상 후계자는 사내수일원수(당시 남방총군최고사령관)를 내세우든 가 아니면 천황의 동생인 삼입관이나 고송관등의 옹립이 좋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국체 보존 위해서 정전은 빠를수록>
『정전은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정전이 곧 무조건 항복을 각오해야 될는지도 모른다. (중략) 정전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은 애오라지 국체 보존을 위해서 이다』고 그의 소신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전쟁이 길어져서 본사결전이 되면 좌익 분자와 일시적 우익 전향자들이 혼란을 틈타 혁명을 선동하게 된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좌익 분자는 연안에서 반전 활동중인 야판참삼씨 등이 미국에 망명중인 대산욱부씨 등가 손잡고 신 정권 수립의 가능성이 있다…』
다만 즉시 정전이 ??상을 알지 못하는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어 의외의 사태가 발전할 우려가 있을 때는 차선책으로 주전론자 중 다른 사람에게 한번더 내각을 구성케한 후 수습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다음 동조내각이 무너진 7월 18일의 전후 사정이 소상히 서술되고 「소기신수상과의 회견」에서 끝맺어 졌다.
한편 사표문은 41년 10월 16일 대미개전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당시 동조육상의 요구로 제 3차 근위내각이 총사직했을 때 외부에 공포할 수 없었던 미·일 교섭의 경과와 육군 당국의 무모한 강경책 등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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