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벤처펀드 '休화산'…2004년 폭발위기

중앙일보

입력

'벤처’라는 단어만큼 극단적으로 상반된 이미지를 함께 내포하는 것도 없다. 어떤 이는 벤처에서 대박과 희망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거품과 쪽박·비리라는 단어를 연상할 것이다. 그 어떤 쪽도 충분한 개연성과 설득력을 지닌다. 벤처는 지난 4년간 영욕의 롤러코스트를 타고 한국 사회를 질주해 왔다.

그러나 요즘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벤처를 바라보는 과거의 시각이 시간적 흐름에 따라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온수와 냉수가 소용돌이 치는 한가운데서 물결의 흐름에 촉각을 세우는 ‘탐색기간’이다.

벤처캐피탈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시장 상황에 따라 벤처 투자 열기가 뜨거워질 수는 있겠지만, 99년의 ‘브레이크 없는 초고속 상승’은 재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벤처의 한계와 좌절을 맛본 시장의 경험은 벤처 열기의 상승에 언제든지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벤처투자의 종착역으로 가는 ‘코스닥 등록’ 티켓 역시 발급 기준이 까다로워졌다. 티켓을 잡고 코스닥이라는 파티장에 들어가도 예전과 같은 ‘귀빈 대접’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출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정말 잘나가는 돈방석의 대명사가 벤처캐피탈이었다. 수백%의 수익률은 명함도 내밀기 어려웠고 실제로 1만%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올리는 펀드도 등장했었다.

한글과컴퓨터에 거의 몰빵을 하다시피 했던 무한기술투자의 무한벤처투자조합 1호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액면가 5백원에 주식 1천만주를 취득한 한컴의 주가는 4만원을 훌쩍 넘어서며 이같은 기적을 일구어낸 것이다.

“99년 2000년에 벤처열풍이 불 때 벤처캐피탈들은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벤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면 뭐든지 입에다 넣었습니다. 정부에서도 벤처기업을 2만개 만든다며 열기를 부추겼고 실제로 98년 이전에 벤처기업에 투자했던 캐피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률을 올릴 때였죠. 문제는 그 때 벤처들에 대한 투자회수에 들어갈 때가 되어오는데, 어느 날 시장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버린 겁니다.”

벤처캐피탈 업계에 종사하는 한 관계자는 벤처캐피탈들의 현 상황을 소화불량에 걸린 거식증(巨食症) 환자에 비유하며 이같이 설명했다.

벤처펀드는 대개 5년이 만기다. 5년이 지나면 투자를 잘했든 못했든 정리를 하고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5년이 채 되지 않았어도 목표수익률을 넘기거나 투자를 모두 회수해서 깔끔하게 손을 터는 경우가 많았고, 2002년인 지금까지도 그 ‘좋았던 시절’의 영향으로 청산하는 벤처펀드들의 수익률은 모두 연평균 두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훈풍을 타고 신설창투사의 숫자는 98년 13개에서 99년 26개 2000년에는 무려 65개에 이르렀다. 투자금액도 98년 2천1백68억원에서 99년 9천7백65억원 2000년에는 1조6천9백70억원으로 급증했다.

벤처캐피탈들의 과식 증세가 최고조에 이른 99년과 2000년에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먹어댄 벤처기업들도 과연 깔끔하게 소화시키고 손을 털 수 있을 것이냐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다.닥치는 대로 먹었으니 질좋은 음식을 먹었을 리 없고 열심히 씹는 동안 시장은 식어버려 소화 기능도 떨어진 데다 코스닥 등록기준도 크게 강화됐다.

바로 99년부터 결성된 벤처펀드들의 만기가 돌아오기 시작하는 2004년을 벤처펀드 대란의 시작으로 예측하는 근거도 바로 이런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2년 뒤를 생각할 만큼 우리 시장상황이 여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덮어두기에는 너무 파괴력이 큰 시한폭탄이다.

‘배째라 펀드’ 속출할 듯

벤처기업에 돈을 대는 투자자들은 크게 엔젤투자자·창투사·투자조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투자조합은 창투사들이 자기자본금 외에 다른 투자자들의 돈을 함께 모아서 투자하는 방식으로 창투사만이 결성할 수 있다. 창투사 자금과 투자조합의 기금을 넓은 의미의 ‘벤처펀드’라고 통칭한다.

올 2월 현재 국내의 창투사는 모두 1백43개, 창투조합은 4백3개다. 이들이 98년 이후 4년간 벤처기업과 초기 기업들에게 투자한 자금의 규모는 총 3조7천5백1억원이다. 창투사가 2조1천78억여원, 창투조합이 1조6천4백23억원을 각각 쏟아부었다.

이 자금을 받은 기업은 총 3천2백74개다. 이 중 코스닥에 등록되거나 매각 등을 통해 투자자금이 회수된 업체가 3백17개사뿐이며, 2천9백57개사는 아직 투자중인 업체다. 3백17개 중에 코스닥에 등록된 업체는 2백23개로 지난 4년간 신규등록된 기업들 중 절반이 벤처펀드 소속이었다. 문제는 남은 2천9백57개 가운데 앞으로 몇 개 업체가 코스닥으로 골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동안 설립된 4백3개의 창투조합 중에서 그동안 임무를 완수하고 해산된 조합은 모두 88개다. 업계 관계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은 정말 운때를 잘 만난 조합이다. 코스닥 열풍의 수혜를 한몸에 받았던 행운아들이다.

이들이 회수한 돈은 본전을 포함해서 1조1천5백30억원으로 수익률은 46%다. 그러나 아직 해산되지 않은 펀드의 2조6천억원가량은 아직 때를 기다리며 잠겨 있다. 그 때가 언제일까. 이들 펀드들의 만기가 돌아오는 2004년 전에 그 ‘때’를 잡을 수 있을까.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부에서는 원래 벤처기업은 5%의 확률로 투자하는 것이라며 5%만 성공하면 본전은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 가정은 그 5%가 모두 시스코나 전성기의 새롬기술 같은 진짜 대박일때만 가능한 것”이라며 “그저 간신히 코스닥에 밀어넣은 수준으로는 5%로 어림도 없다”고 말했다.

현재 코스닥 등록기업은 7백여개로 이미 포화상태에 가깝다. 계속 등록심사를 통해 코스닥으로 보내고 있긴 하지만, 계속 등록기준을 강화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코스닥 등록기업수가 두 배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2천9백57개 중 2천5백여개사에 쏟아부은 돈은 회수불능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우려 섞인 분석이다.

벤처펀드에 투자한 수많은 개인들과 기업들이 닭을 솥에 넣고 삶다가 지금쯤 잘 익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뚜껑을 열어보는 순간 머리 부분만 살짝 데쳐진 생닭을 보게 되는 기분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벤처펀드를 관리하는 중기청의 한 관계자는 “코스닥 시장이 식어버리면서 벤처펀드들의 투자자산 가치가 많이 하락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99년 같은 벤처열기가 다시 한 번만 오면 벤처펀드 대란 등의 우려는 쉽게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보면 99년 같이 기적같은 시기가 오지 않는다면 벤처펀드들의 대란은 피하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어떤 쪽의 예상이 맞을까.

누가 이들을 시한폭탄으로 만들었나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의 벤처기업을 근육은 없고 살만 토실토실 오른 기형인간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벤처기업에 돈을 주더라도 아침·점심·저녁 세끼로 나눠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책자금은 모두 초기 기업에만 몰려있다. 분유만 잔뜩 퍼 먹이고 대문밖으로 내보내니 다들 밖에서 대문고리만 잡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눈만 멀뚱거리는 상황이다.”

벤처펀드들의 부실은 처음부터 마구잡이로 총알을 쏘아댈 수밖에 없는 법 규정에서도 일부 기인한다. 중소기업창업지원법에 따르면 벤처펀드는 조합구성 첫 해에 전체 투자자금의 20%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는 30%, 그 다음해는 50%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즉 3년 안에 총알을 다 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기업에 투자하라는 제한은 특별히 없지만 일단 총알은 정해진 시간 안에 다 쏴야 한다는 것이다.

당초에는 투자조합의 자금 유용을 막기 위한 규정이었지만, 2000년에 벤처펀드들이 급증하면서 이 규정에 덜미를 잡힌 펀드들은 그럴 듯한 벤처기업을 찾아다니며 ‘좀 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옥석을 가리는 냉정한 투자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IT 분야에서 ‘쏠 만한’ 업체들이 바닥이 나자 구조조정펀드·인터넷펀드·바이오펀드·영상펀드·엔터테인먼트펀드·게임펀드·콘서트펀드 등 다양한 펀드들이 구성됐다. 여성 기업인을 우대한다며 여성이 사장인 기업에 투자하라는 여성벤처펀드도 생기는 등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왜곡하는 현상도 함께 나타났다.]

깡통펀드들이 늘어나자 벤처캐피탈의 도덕적 해이도 함께 증가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망할 것 ‘그 때’가 오기 전에 내 몫을 챙겨두자는 심리다. 투자를 해주는 댓가로 리베이트를 받는 것이 관행화되고 유령회사에 투자해서 투자금을 뒤로 빼돌리는 대담한 작전도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악순환이 벤처펀드의 부실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갈수록 코스닥 시장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것도 펀드대란의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구조조정전문조합(CRC)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의 등록을 막겠다는 방침이나 코스닥 등록 요건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벤처기업들의 비리로 인한 인과응보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투자기업의 코스닥 등록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벤처펀드들에게는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펀드를 살리자니 코스닥시장이 죽고 시장을 살리자니 펀드들이 질식하는 딜레마는 당분간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정부가 시장을 살리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이는 만큼 벤처펀드들의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출처:이코노미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