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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에게 직업 전문성을 허하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의료계를 대상으로 한 정부의 압박이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 보험사기와 세무조사, 리베이트 집중단속을 각 부처마다 올해 핵심과제로 내놨다. 의료계는 정부가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국민에겐 불신을 조장하고 의료인에겐 자괴감을 들게 하는 악순환만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정부와 의료계 사이에 불신이 높아만 가는 시점에서 외국의 사례를 짚고 개선안을 찾아본다.

범부처 의료계 압박, 리베이트 처벌 갈수록 강화


최근 금융위원회와 법무부는 연두 업무보고에서 의료계를 대상으로 한 불법행위 조사에 수사력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위는 3조원 대에 달하는 보험사기와 연루된 문제의 병원 명단을 전 부처가 공유해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밝혔다. 이를 위해 전담조직을 확대해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의사 등을 포함한 고소득 전문직을 대상으로 세무조사에 착수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강남 대형 성형외과에서는 국세청 직원들이 세무 관련 자료를 가져갔다는 후문이다.

무엇보다 핵심은 리베이트다. 법무부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의약품 리베이트에 수사력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검찰·경찰청·보건복지부·국세청·국민건강보험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범부처적으로 공조를 강화 할 계획이다. 당장 4월부터는 리베이트를 받은 의료인에 대한 행정처분 기준이 강화됐다. 기존에는 1년 이내에 반복 위반한 리베이트가 적발돼야만 가중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가중처분이 적용되는 기간을 5년으로 연장했다. 또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행정기관의 조사와 판단만으로 행정처분이 가능해졌다.

여기에 리베이트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오제세 의원(민주통합당)은 리베이트 수수 의료인의 명단을 공개하고, 의료기관도 리베이트를 받을 수 없도록 명시하는 쌍벌제 개정안을 내놨다. 개정안에서는 리베이트를 수수한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하고 과징금을 상향 조정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잠재적 범죄자 취급, 국민불신 조장 악순환
의료계는 허탈함을 호소한다. 의료인를 대상으로 한 리베이트 등의 기획조사가 언론을 통해 하루 이틀 걸러 발표되면서 의사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날로 싸늘해진다. 사회로부터 잠재적 범죄자로 매도되는 게 억울하고 자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굴지의 대형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A교수는 “의료인이 종교집단도 아닌데 이들보다 더한 순백색을 강요한다”며 “지금은 합법적인 기준 내에서 제약사와 가끔 밥을 먹는 것조차도 소문이 잘못 날까봐 피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정책은 의료비를 줄이지 않으면 정부 예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약값을 낮추려는 무리수이자 꼼수”라며 “외국은 의료 뿐 아니라 전 분야의 규제를 강화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대학병원의 B교수는 의사에 대한 국민인식에 섭섭함을 호소했다. 그는 “아무리 늦어도 8시에 출근하고, 아무리 빨라도 8~9시에 퇴근한다. 사생활이 거의 없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많은 의사들이 가족과 문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근본적인 시스템을 해결하지 못하고 지적한다. 그는 “오리지널 약값은 인정해주고 복제약값을 깎아야 제약사가 여력이 안돼 로비를 안한다”며 “대학병원은 리베이트를 학회 지원과 의국 지원 명목으로 쓴다. 관행이 사라져야 하는 면도 있지만 결국엔 이런 지원이 없으면 학회와 의국을 유지하지 못하는 수가를 비롯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수들은 공정경쟁규약을 포함한 정부의 리베이트 제재 강화로 학술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방에 있는 C대학의 한 교수는 “왜 의사만이 항상 감시 대상이 되고 합법적인 범위의 리베이트가 너무 협소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학술활동이 활발한 교수는 일년에 2~3차례 해외학회에 참석하는데 회당 몇 백 만원씩 드는 걸 자비로 충당하긴 힘들다”며 “지원 범위가 까다로우니 연구활동에도 제약을 받는다”고 말했다.
주변 시선도 부담스럽다. 이 교수는 “의사 리베이트가 이슈로 오르내리면 환자들이나 주변 사람의 시선이 아무래도 삐딱해지는 걸 느낀다”며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가 범죄에 속한사람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볼까봐 조심스럽다“고 토로했다.


외국 사례 들여다보니…
미국도 보건의료 서비스분야에서 리베이트를 제공하거나 수수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다. 의료인과 의료인, 의료기관 간 수수되는 리베이트도 불법에 포함되며, 수수 금액의 3배에 해당하는 벌금, 5년 이하 징역과 2만5000달러 이하 벌금, 의사면허 정지 등 엄격한 처벌이 따른다. 그러나 허용되는 리베이트 범위가 넓고, 그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제시돼 있다는 게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법무법인 세승 현두륜 대표변호사는 “미국은 리베이트에 대해 엄격히 규제하고 처벌하면서도 과도한 리베이트 금지가 합법적인 비즈니스까지 제한하고, 의약품 산업을 위축시킬 수 있어 경제적 이익의 범위를 폭 넓게 허용한다”고 말했다.
또 미국 후생성은 리베이트에 관해 상세한 안내서를 배포하고, 의료인과 의료기관에 교육 자료로 제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가장 큰 특징은 사전적 규제방식을 채택하고 자율규제를 존중한다는 점이다.
현두륜 변호사는 “의약품 의료기기 관련업체들이 의사나 병원에 제공하는 모든 지불 내역을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정부는 그 내용을 대중에 공개한다”며 “이는 자료 공개를 통해 불법 리베이트를 사전에 규제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후생성 감찰관실은 제약사외 의료기관이 내놓는 자율준수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불법 리베이트에 해당하지 않는 마케팅 범위에 대한 지침을 매년 발표한다. 이는 자율 규제와 정부 규제 사이의 간격을 최소화하고, 자율 규제 지침에 실효성과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도 미국처럼 의료산업계 내부에서 이뤄지는 자금 지원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감독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독일은 최근 대형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민간의료기관 의사들에게 강의료와 의약품 처방 대가로 금전을 지급한 사건에서 모두를 무죄로 선고했다. 현 변호사는 “독일은 공무원이 직무상 부정행위를 한 경우만을 리베이트로 규정한다”며 “이에 따라 법원은 의사들이 자영업자이고, 이들에게 주어진 이익은 독일 형법에서 인정하는 범위에 들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 “우리도 반성하고 추운 겨울 견뎌야”
의료인을 향한 사회적 시선이 차갑고 정책이 강압적인 데는 의료인 스스로의 윤리적 책임도 분명하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한국의료윤리학회 최보문 회장(가톨릭의대)은 “의사가 한동안은 가난해야 하고, 사회적 불신과 모욕을 견뎌내는 추운 겨울이 지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지금은 우리사회가 예전보다 윤리적으로 성숙해지면서 그동안 문제가 아니었다고 받아들였던 게 문제가 되는 과도기에 서있다”며 “리베이트는 과거 관행이었지만 지금은 문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사의 오만도 문제를 악화하는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최 회장은 “우리는 제약사로부터 그까짓 금품을 받더라도 의학적 결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사는 사회적 고위층이기 때문에 높은 수입을 받아야 한다 여기고 저수가때문에 수입이 너무 적다고 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오만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위기이자 과도기이다. 윤리적 성숙 수준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윤리연구회 전 회장이자 의약평론가인 이명진 원장(명이비인후과)은 “의사들은 1980년대까지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명예와 돈을 모두 거머쥐었는데 그 시대에 정말 갖춰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며 “이후 젊은 의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악습을 물려받고 죄인취급을 받으며 그 짐을 다 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진 원장은 매달 첫 번째 월요일에 의료윤리와 관련한 주제로 공부를 하는 현 의료윤리연구회를 창립한 초대 회장이다. 그는 “선배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젊은 의사들이 있기 때문에 의대 교수와 개원의들을 대상으로 한 윤리교육이 절실하다”며 “연구회 심포지엄에는 이비인후과 의사회, 중랑구 의사회를 비롯한 각계 의사들이 모여 의료윤리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인 스스로 윤리적 가치를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한 대학교수는 의대를 지원하는 학생들부터 의료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사가 죽을 때까지 돈을 벌수 있다는 이점이 있긴 하지만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의대생이나 의대를 지원하는 학생이 잘 모른다. 힘든 노동 강도를 유지해야 월급을 유지한다”며 “소명의식 없이 오면 다른 쪽으로 외도를 할 수밖에 없다. 부정과 유혹에 휩쓸리기 쉽다”고 꼬집었다.

법치만능주의 금물, 자율적 규제기구 역량 키워야
정부와 의료계 사이 날선 대립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해법 중 하나로 의료계와 관련업계의 자율규제에 힘을 실어주는 정책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두륜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허용되는 경제적 이익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자율적 규제가 미흡하다”며 “특히 미국은 리베이트에 관한 교육과 홍보자료를 제공하고 관련 업계의 자율적 규제도 존중한다. 이런 미국의 규제방식을 우리나라가 참고할 만하다”고 제언했다. 법무법인 세종 염동신 변호사 역시 “리베이트가 허용되는 범위와 불법으로 문제 삼아야 할 범위를 명확히 구분하고 제약사와 의료계가 자율 준수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체감시와 시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가인 의사 등을 대상으로 하는 형사처벌 도입과 집행은 최대한 신중하게 하는 것이 의료계에 대한 국민신뢰 확보에 있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명진 원장도 의료계가 일부 집단의 잘못을 스스로 드러내고 자정할 수 있도록 전문가 단체로서 힘을 길라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전문가 단체의 역할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힘을 길러주는 게 첫 번째”라며 “정부 입법자들이 법률 만능주의로만 치달으면 멀리가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다만 정부입장에서는 해결안 모색을 두고 여전히 온도차가 있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김주경 입법조사관은 앞으로 리베이트에 대한 행정 처분 수위가 높아질 거라 전망했다. 김 조사관은 “사회적으로 이미 리베이트는 나쁘다는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여지가 없다”며 “특히 전문성이 강한 의료인과 관련해 리베이트는 부패라는 사회적 시선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행정처벌 수위는 높아질 것이고 법이 세지면 근절될 거란 게 입법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복지부 약무정책과 김혜인 사무관은 “정부 정책이 의약계와 산업계를 압박하려는 건 아니다”라며 “보건의료 유통분야를 선진화하고 제약 산업이 도약하는 데 중요한 건 지금과 같은 국민 불신이 아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정책 방향을 가지고 제도적 개선을 마련해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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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 기자 tia@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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