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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심리의 심층 해부|「귀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무덤 속같이 조용한 고가. 전화 속에 남성을 상실한 남편. 그 남편을 위해 새벽마다 삐그덕거리는 2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약시중을 드는 여인. 어쩌면 질식해 버릴 것 같은 그 음영 짙은 고독감을 통해 이만희 감독은 영과 육, 의무와 본능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한 여심의 세계를 집요하게 추구한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예비역대위 동우(김진규)는 신문에 연재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작가. 하지만 아내에 대한 자책감이 때로는 「히스테리컬」하게 표현된다. 남편의 원고를 매일같이 신문사로 나르던 지연(문정숙)은 어느 날 젊은 기자 강욱(김정철)을 알게된다. 공규이나마 14년동안 지켜온 아내로서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는 지연은 그러나 욱의 작열하는 애정 앞에 무력한 자신을 발견한다.
동우가 아내의 애견을 엽총으로 죽이던 날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욱의 품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욱과의 도피행을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온 새벽, 그녀는 끝내 아내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줄거리.
말하자면 정신적으로만 맺어진 부부생활의 붕괴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이 감독은 「만추」에 이어 또다시 여성심리의 심층묘사에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문정숙의 뛰어난 연기는 근래에 보기 드문 일품. 상대적으로 김정철의 연기가 빛을 잃었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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