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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칼럼] 고연비 이제 그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부터 수입차의 베스트 셀링 모델은 단연 ‘BMW 520d’다. 지난달 1000대 조금 못 미친 997대를 팔아 압도적 1위였다. 가격이 6260만원인 이 모델은 8단 자동변속기에 2.0L 디젤 엔진을 달고 무려 16.4㎞/L의 놀라운 연비를 뽐낸다. 차체가 큰 데다 중형차 가운데 연비가 으뜸이라 잘 팔린다.

 동급 국산차에선 현대 그랜저 HG 3.0(가격 3463만원)이 제일 잘나간다. 520d보다 출력이 좋고 편의장치도 호화롭다. 이 차는 3.0L 가솔린 엔진에 6단 자동변속기를 달고 연비가 10.4㎞/L 나온다. 재미난 점은 그랜저를 사려던 고객이 ‘연비가 50% 이상 좋다’는 경제성에 끌려 2800만원 비싼 520d로 변심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주판을 튕겨보자. 연간 2만㎞를 뛴다면 어림잡아 그랜저의 연료비는 386만원, 520d는 221만원이 들어간다(20일 유가정보 사이트 오피넷 기준, 서울 휘발유 가격 2011원, 디젤 1817원). 연간 연료비 차이는 165만원이다. 기름값으로 본전을 뽑으려면 17년 이상 타야 한다. BMW가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이점을 감안해도 경제성 때문에 520d를 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연비(燃費)의 뜻은 ‘주행거리당 소비하는 연료의 양’이다. 고연비(高燃費)는 연료 소비가 높다는 뜻으로 연비(燃比)가 나쁜 걸 말한다. 연료비를 아끼려다 이렇게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는 고연비 생태계가 많아져 걱정이다.

 선행학습이 대표적이다. 학년이 높아지면 어련히 배울 것을 남보다 먼저 배워 한발 앞서보겠다는 고연비 생태계다. 학교에서 고학년 내용을 가르쳐주지 않으니 사교육 시장이 극성이다.

 이명박(MB)정부 이전만 해도 서울 강남에서 이런 말이 유행했다. 아이를 소위 SKY(서울·고려·연세대) 명문대에 보내려면 ^할아버지 재력 ^엄마 정보력 ^아빠 무관심이 정답이란 거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수백만원 하는 족집게 과외를 엄마가 잘 챙겨야 하는 현실을 빗댄 말이다. 괜히 아빠가 가세해 ‘고액 과외비 운운’ 하면 불화만 생긴다는 의미로 무관심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명문대만 가면 취업뿐 아니라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던 시대에 나온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아빠의 역할이 바뀌었다. ‘인턴은 아빠의 능력’이란다. MB정부 때 입학사정관을 포함한 3000여 개의 수시전형이 난립해 고교생까지 스펙이 중요해진 까닭이다. 더구나 명문대생 취업마저 어려워지면서 대기업 입사의 필수인 인턴 경력은 아빠의 힘으로 해결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다간 조만간 ‘취업=아빠의 능력’으로 바뀔 지경이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도 고연비 현상은 여전하다. 대선 어젠다였던 경제민주화에 그치지 않고 창조경제까지 가세한다. 모두 그럴싸한 단어지만 명확한 뜻을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소통해야 할 여당과 정부 고위층이 제각각 다른 의미로 쓴다. 기업들도 창조경제에 보탬이 되겠다고 하면서 갈팡질팡한다. 오죽하면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정의를 해줬을까. 창조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경제 교과서에 나오는 말인데도 그렇다.

 최근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자녀 한 명을 대학까지 보내는 데 드는 비용이 3억원이 넘었다. 둘이면 6억원이다. 이를 어떤 월급쟁이가 감당할까. 이러니 결혼을 미루고 아이도 하나 이상 낳지 않는다. 당연히 경제활동인구 감소로 이어지고 경제 활력이 떨어진다. 이웃 나라 일본이 아닌 우리 사회의 고연비 현상 후유증이다.

 요즘 대체휴일제 법안 통과가 직장인 사이에서 화제다. 바뀔 연휴 스타일이 궁금해서다. 휴일을 줄이고 야근을 늘려 생산성을 높일 순 없다. 이건 박정희 시대의 개도국 모델이다. 단위시간당 생산성을 높이는 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다. 대체휴일제 덕에 쉬는 날이 연 2∼3일 많아지면 소비도 늘고 생산성도 높아져 과연 우리 사회에 선순환 효과를 안겨줄 것인지 궁금하다.

김태진 경제산업 에디터 tj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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