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자 신상 털기 … 금융정보 공유 나선 EU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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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유럽연합(EU)이 조세 회피 단속을 강화하기 위해 회원국들끼리 은행 계좌 등의 정보를 공유하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EU가 개인정보 보호 원칙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이런 조치를 추진하는 목적은 세금 누수를 막아 금융위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탈세 스캔들로 악화된 여론을 만회하려는 일부 EU 정상의 속내도 담겨 있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열린 EU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장 회담에서 조세 피난처 단속을 강화하는 방안이 집중 논의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 등이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 5개국은 회원국 금융사가 보유한 고객의 계좌 관련 정보를 자동 공유하자는 방안을 내놨다. 공유 대상이 되는 정보에는 예금 이자 소득뿐 아니라 신탁기금이나 재단기금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도 포함된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네덜란드·벨기에·폴란드·루마니아도 동참 의사를 밝혔다. 유럽 최대의 조세 피난처로 악명 높은 룩셈부르크가 최근 은행의 비밀 보장 원칙을 포기하고 해외 고객의 금융 계좌 정보를 해당국에 제공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 방안에 힘을 더하고 있다.

다음 달 22일로 예정된 EU 정상회의에서도 세금 회피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라 더 많은 회원국이 이 방안에 뜻을 함께할 것으로 보인다고 NYT는 전했다. 알기르다스 세메타 EU 세제 담당 집행위원은 “탈세와의 전쟁 대상은 궁극적으로 배당 수익이나 부동산 등 양도소득, 저작권 사용료 등까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프랑스·독일이 탈세와의 전쟁에서 선봉에 선 데는 국내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조세 피난처인 채널제도, 케이먼제도, 버진아일랜드 등을 둔 영국은 탈세의 온상이라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재무장관 마리아 펙터가 영국을 ‘탈세와 돈세탁으로 축복받은 섬’이라고 부르며 “집안 단속이나 잘하라”고 일갈했을 정도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로서는 선제적으로 탈세와의 전쟁에 나서 이미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경우 제롬 카위자크 전 국세·예산장관의 스위스 비밀계좌 보유 스캔들로 정권 신뢰도에 흠집이 났다. 올랑드는 10일 기자회견에서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조세 피난처를 뿌리 뽑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은행들이 매년 자회사의 활동 내역 보고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의 버진아일랜드 비밀 계좌 폭로로 타격을 입었다. 이 단체가 고객들의 돈을 비밀리에 해외에 은닉한 주범으로 독일 은행들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 일로 독일 국민이 불안을 느끼고 있고, 선거 이슈로 비화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13일 독일에서 만난 메르켈과 캐머런이 한목소리로 탈세를 뿌리 뽑자고 목소리를 높인 데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다고 가디언은 분석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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