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배용의 우리 역사 속의 미소

매화향과 함께한 자연의 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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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봄철이 시작되니 여기저기 온갖 아름다운 색깔의 꽃들이 만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옛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꽃은 매화였다. 매화는 이른 봄 눈 속에서 꽃을 피우니 그 꿋꿋한 의지와 은은한 향기가 선비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매화는 평생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절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또 교육의 나무로 서원에 많이 심었는데 이른 봄철에 피기 때문에 자라나는 내일의 꿈나무 학동들에게 비유하기도 하였다.

 바로 옆의 그림은 한말의 화가 조석진(1853~1920)이 그린 고사도다. 조석진은 도화서 화원으로 남종화풍을 계승한 산수, 인물, 물고기, 화조 등 각 분야에 능했다. 이 그림은 『방학인귀설만선(放鶴人歸雪滿船)』이라는 화제에서 보듯이 송나라 때 대표적 은일자인 임포의 고사를 그린 것이다. 그는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梅妻鶴子] 일생의 대부분을 고고하게 은일생활 한 인물이다.

조석진 ‘고사도(故事圖)’.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눈 내린 산에 매화나무를 바라보는 잔잔한 미소를 띤 노옹의 표정이 달관의 경지에 이른 느낌이다. 이 그림에서는 학은 보이지 않고 학을 날려 보내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강가에 핀 매화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학은 청운의 꿈을 상징하고 항상 이상을 품은 맑고 청정한 선비정신의 표상이다. 어떤 세속의 유혹이나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고고함은 선비들이 추구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자연은 인간에게 순리의 지혜를 가르쳐준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를 바꿀 수 없듯이,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노년으로 가는 여정은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다. 옛 선비들의 배움의 첫 시작은 자연의 언어를 읽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나무의 늘 한결같은 푸름을 유지하는 의리정신, 대나무의 절개, 할아버지 때 심으면 손자 때 가서야 열매를 맺는다는 인내와 끈기의 은행나무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노옹의 미소를 한번 음미해 볼 때 마음의 평정과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