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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일까 숙명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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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선구
경제부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엄청난 영화광이다. 회식 자리에서 자주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대표적인 게 자신이 좌장이 돼서 가끔 소집하는 정부 세제실 출신 모임. “존 웨인이 말야~”라면서 말을 시작하면 참석자들은 속으로 ‘아이고, 이젠 죽었다’라고 비명을 지르며 영화 줄거리와 평을 꼼짝없이 다 들어야 한다. 때론 5분 버전, 10분 버전도 있지만 주로 한 시간 버전이다.

 그가 영화에 몰입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경남 마산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생면부지의 서울고로 유학 와서는 영화로 외로움을 달랬다. 지금은 사라진 시청 인근 영화관을 수시로 찾았다고 한다. 얼마나 영화를 보러 다녔는지 단속 교사에게 여러 번 걸려 퇴학 위기까지 처한 적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서울고 교사들의 심사숙고 끝에 살아남았는데, 이유가 흥미롭다. “서울대 갈 놈 하나 날리면 안 되겠지?” 기사회생으로 졸업한 그는 나중에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다. 만약에 그가 정학이나 퇴학을 당했다면? 그의 운명은 바뀌었을지 모른다. 서울대 입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기재부 장관이 아니라 학자나 사업가가 됐을지도…. 하지만 그의 운명은 우리나라 경제를 책임지는 자리로 정해졌나 보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을 둘러싸고 말이 많은 모양이다. 박근혜 정부 첫 경제부총리로 적격인가 하는 논란이다. 무색무취한 인물에서부터 정책을 잘 집행할 사람까지 다양하다. 전직 관료들의 평에 따르면 그는 전혀 나대지 않는 스타일이자 지독한 일벌레다. 국장 시절 직원들과 함께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거의 매일 야근했다. 경기고 재학 때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에겐 집요함도 있음이 동창들 증언을 통해 나온다. 한 고교 동창은 “오석이가 운동은 젬병이다. 골프도 잘 못 친다. 그런데 테니스는 굉장한 수준급이다. 한번 테니스를 해보고는 ‘이거 나에게 맞네’라며 지독하게 빠져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요직인 경제정책국장을 지냈다. 한국 경제의 조타수 역할을 하는 자리다. 역대 경제정책국장들은 어김없이 차관보와 차관으로 승진하는 게 관례다. 그러나 그의 다음 보직은 국고국장이었다. 국고국장은 기획재정부 내 선임 국장이지만 한직에 속한다. 당시 장관은 강봉균씨. 강 전 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엇을 물어도 답이 없더라”라고 했다. 이 말이 걸렸는지 “그를 홀대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경제기획국장 할 때 과장으로 데리고 일했고, 차관보 때는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국장급으로 파견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현 부총리는 국고국장도 두 달여밖에 못 했다. 이후 세무대학장을 맡았지만 그나마도 세무대학이 없어져 공직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아마 현 부총리에게 한이 남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총리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게 그의 운명이다. 그를 두고 능력 운운하며 말이 있지만, 솔직히 그동안 똑똑했다는 장관들이 과연 성과를 냈는가는 의문이다. 명석하기로 유명해 제갈공명에게 발탁된 마속도 한순간의 시행착오를 범해 촉군을 대패시킨 큰 과오를 범하지 않았나.

 신한금융지주 한동우 회장은 신한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다. 은행장 경쟁에서 밀려나 계열사 대표로 나갔지만 더 크게 돼서 컴백했다. 그게 그의 운명이었다. 그 자신도 “난 핀치히터였는데 회장 된 게 내 운명이었나 보다”라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이사회가 물었다. “당신이 회장이 꼭 돼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 회장 후보가 열변을 토하며 답했다. “꼭 할 일이 있다. 반드시 파벌주의를 없애겠다. 신한에는 신한파만 있을 뿐이다.” 그러고는 파벌 타파에 매진하고 있다.

 그가 회장이 된 것은 운명이었고, 파벌 타파는 숙명이었다. 운명과 숙명은 비슷한 말이지만 숙명이 더 강한 느낌이다. 운명(運命)은 ‘운전할 운(運)’자에서 보듯 변하는 것이요, 숙명(宿命)은 ‘잘 숙(宿)’자처럼 불변이다. 현 부총리가 경제 수장이 된 것은 운명이요, 나락으로 빠진 한국 경제를 살리는 게 꼭 해내야 할 숙명이다. 현 부총리, 운명처럼 왔지만 숙명을 남겼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사람이 한번 왔다 가는구나’라는 평을 듣지 않으려면.

정선구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