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카드 비밀번호 술술 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주말 서울시내 한 백화점에서 코트를 산 주부 김은영(34)씨는 아주 께름칙한 경험을 했다.

"지불을 하려고 백화점카드를 냈더니 젊은 여자 판매원이 비밀번호를 물어봤다. 주위사람들이 들을까봐 작은 소리로 알려줬더니 '××××요?'라고 큰소리로 확인하더라. 그러고는 카드를 갖고 사라졌다가 10분 쯤 뒤 다시 나타났다." 신용카드와 현금카드의 비밀번호가 모두 같다는 金씨는 "아직도 불안하다"고 말한다.

카드를 언제 어디서건 돈으로 쓰이게 하는 작동키 '비밀번호'. 하지만 카드 소지자도, 카드를 받는 점포도, 금융기관도 비밀번호에 대한 보안의식이 너무 없다. 비밀번호를 묻고 알려주는 일이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이뤄지고, 은행에선 비밀번호가 적힌 예금 청구서가 아무렇게나 버려진다.

누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 함부로 널려 있는 것이다. 카드가 사실상의 현금이자 수표인 '카드시대'에 맞는 보안의식과 비밀번호 관리체계가 절실하다.

◇"모두 다 무신경"=최근 회사에서 법인카드를 만들려고 가입신청서를 작성하던 안상학(41)씨는 고민에 빠졌다. 여직원이 취합해 총무과로 넘길 신청서에 비밀번호를 적게 되어 있었던 것.

신청서가 신용카드사로 전해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비밀번호를 알게 될까 고민한 그는 결국 엉뚱한 비밀번호를 적었다. 安씨는 "가입단계에서만도 네댓명은 알 수 있게 돼있는데 비밀은 무슨 비밀번호?"라며 어이없어했다.

얼마 전 월간 다큐멘터리 잡지의 구독신청을 하려던 대학원생 최환석(25)씨는 잡지 속에 끼워진 엽서 형태의 신청서를 보고 놀랐다. "신용카드번호와 유효기간, 그리고 서명까지 적도록 돼 있었어요. '카드 서명과 동일한 서명을 해주십시오'라는 설명까지 있고. 잡지사에 전화를 해 따졌더니 '아직 사고가 난 적은 없다'고 해요. 그러고는 '불안하면 전화로 카드번호와 유효기간을 불러달라'고 하더라고요. "

그는 카드번호와 유효기간만 알아내도 인터넷 등에서 결제가 가능한 판국에 신청엽서가 우편집배원→우체국→우편집배원→잡지사→담당자까지 거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은행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새로 계좌를 만들 때 적는 신청서의 비밀번호란도 그렇고, 계좌에서 돈을 빼낼 때 비밀번호를 적도록 한 매출전표도 그렇다. 카드를 교체할 때도 "고객님 비밀번호가 뭐지요?"라고 묻는 게 보통이다.

◇"무지로 인한 피해"=소비자단체측은 "이런 사례들이 모두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업체가 "경품을 보내기 위해 신용정보를 조회해야 한다"며 신용카드번호와 유효기간를 물어보면 대부분 거리낌없이 알려준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소비자보호센터 조욱현 민원상담팀장은 "몰라서 피해를 보았다 하더라도 비밀번호를 스스로 알려준 경우엔 신용카드사가 보상해주지 않는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원낙연.문병주 기자 <yann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