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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에서 명당이란 … 학군·교통 좋아 살기 편한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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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풍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보의 정태수(90) 전 회장이다. 지금은 해외도피 중인 범법자 신세지만 1980~90년대만 해도 재계는 물론 정계까지 쥐락펴락한 재계 10위권의 재벌 총수였다. 이 모든 게 대치동 은마아파트 성공신화로부터 출발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풍수와 역술을 신봉했다. 세무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52세라는 늦은 나이에 창업을 한 것도 한 역술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주택사업 역시 “흙(土)과 관련한 사업을 하라”는 말을 따른 것이라 한다.

원래 대치동 은마아파트 자리는 비만 오면 인근 탄천과 양재천이 범람하던 곳이었다.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주위는 쪽박산에 둘러싸여 살기에도 답답했다. 정 전 회장은 1970년대 말 사실상 버려진 이 땅을 헐값에 사들여 고개를 밀고 4000가구가 넘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건설했다. 처음엔 생각만큼 분양이 되지 않아 부도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으나 1980년 초 2차 오일쇼크로 규제가 완화돼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면서 미분양 아파트가 20일 만에 전부 팔렸다. 단숨에 현찰 2000억원을 거머쥐며 창업 6년 만에 재벌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정 전 회장은 줄곧 땅에 집착했다. 그중에서도 대치동은 그에게 특별한 땅이었다. 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계에서의 위상과 걸맞지 않게 한보그룹 사옥을 은마아파트 상가 3층에 계속 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신입사원이 사무실 찾는 데 애를 먹을 정도로 불편하고 초라한 곳이었지만 번듯한 새 사옥을 지어 이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명당 자리에 대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정 전 회장은 수서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시작으로 수차례 옥살이를 했고, 지금은 그의 도피생활 자금을 마련하느라 셋째 아들 부부가 횡령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고난이 후손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치동 땅의 기운이 다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명당이 아니었던 걸까.

 풍수 전문가인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좀 다르게 설명한다. 대치동 은마아파트나 은마 상가 자리가 특별히 명당이어서 한보 신화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저 시대적 요인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산업화·근대화가 이뤄지며 발전할 터가 필요했는데, 땅값이 거저이다시피 할 정도로 워낙 싸 개발 부담이 없던 강남이 낙점됐다”는 것이다. 명당을 잡아 흥한 게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흥했으니 명당이란 설명이다. 이 말을 그대로 믿으면 사실상 풍수 무용론(無用論)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헌재·박현주도 풍수 중시

그러나 정 전 회장 뿐 아니라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등 식견이 뛰어난 정통 경제 관료는 물론 냉철한 검사조차 풍수를 아주 무시하지는 못한다. 대검찰청은 정상명 검찰총장 시절인 2007년 풍수 전문가인 조용헌 원광대 교수를 불러 풍수 문답을 하기도 했다. 특강 이름은 ‘검찰 목요혁신 아카데미’였지만 사실 궁금했던 건 서초동 대검 터의 풍수였나 보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 총장이 “대검 좌측은 공동묘지, 우측은 바위였다”고 우려를 표하자 조 교수는 “이곳이 원래 험한 땅”이라며 “검찰은 험한 일을 하는 거친 기관이니 험한 땅에 입지한 게 숙명일 수 있다”고 답했다. 재계는 말할 것도 없고 돈을 만지는 유수 금융회사도 풍수를 꽤 따진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사무실 책상 위치 하나까지 풍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건 기본이고 사옥 자리를 정할 때 아예 지관을 대동하기도 한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대표적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당시 과학적 도구의 도움 없이 사람의 살아있는 기운(생기·生氣)만을 감지해 땅에 매몰된 사람을 찾아내 화제를 모았던 목포대 임경택 교수가 박 회장을 돕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창조 교수는 현대적 개념의 풍수와 도시 명당을 논하며 “욕은 먹겠지만 (지금 시대 명당이냐 아니냐의) 객관적인 잣대는 집값”이라고 말했다. “생활의 편안함을 보장해 주는 게 명당의 기본요소인만큼 그런 편의성이 반영된 게 집값으로 나타나고, 결국 집값 비싼 곳이 명당”이라는 설명이다.

“집값 비싼 곳이 명당”

정말 그럴까. 최 교수를 비롯해 풍수 전문가 5명이 신(新) 십승지(十勝地)로 꼽은 강남의 아파트 단지(江南通新 4월 3일자 2~3면 참조)와 인근 아파트 단지의 부동산값을 비교해봤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등 명당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5곳의 3.3㎡(평)당 평균 매매가를 따져봤더니 대치동 은마·미도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적게는 250만원에서 많게는 1100만원까지 더 비쌌다. 은마·미도 아파트만 인근 선경아파트보다 더 쌌다. <그래픽 참조> 명당이라 비싼 것인지, 아니면 비싸서 명단인 것인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 같은 평수라도 동 위치에 따라 값이 다르다.

 그렇다면 혹시 명당 아파트 단지 내에서 더 비싼 값에 거래되는 아파트가 풍수 전문가가 보기에도 정말 명당일까. 거꾸로 명당은 집값도 비쌀까. 결론부터 말하면 명당 동(棟)으로 꼽힌 곳은 실제 조망권 등 입지가 비슷한 인근 동에 비해 집값이 더 비싸기는 했다. 동일한 조건을 맞춰 인근 부동산에 문의해 가격을 비교해본 결과 명당 동의 집이 5000만~8000만원가량 더 비쌌다.

사실 이에 앞서 도대체 어떤 동이 왜 명당인지부터 따지는 게 먼저다. 풍수 전문가 사이에 답이 엇갈렸다. 풍수 전문가들에게 “명당 단지 내의 명당 동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더니 몇 사람은 자신있게 어디가 명당 동인지 꼽았다. 그러나 최 교수 등 일부는 “고르기 어렵다”고 답했다. 최 교수는 “주관이 워낙 많이 섞일 수밖에 없어 명당 동 찾기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그런 전제 아래 “교과서적 명당은 이상일 뿐”이라며 “내가 평안을 느낄 수 있다면 판자촌이라도 그곳이 명당”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의견은 일단 뒤로하고 명당 동으로 꼽히는 곳이 어딘지 살펴봤다. 압구정동 구현대 단지 안에서는 대체로 한강변의 10~13동과 20~25동, 그리고 단지 중심부에 있는 71~76동이 이른바 명당 동 군(群)에 속했다.

 김민철 건국대 부동산아카데미 지도교수는 “현대아파트가 명당인 이유는 한강 물이 휘감아 흐르는 득수형(得水形)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그중에서도 10~13동과 20~25동은 그 기운을 많이 흡수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재물운이 좋은 곳은 13동이라고 한다. 양만열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풍수에서 물은 돈을 의미하는데 13동은 물 기운을 가장 잘 받아 돈이 많이 들어오는 자리”라며 “사업가가 살기에 좋다”고 말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에는 명사가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순재·차인태·임성훈·최은경 등 방송인과 개그맨 강호동·유재석·노홍철, 탤런트 김희애 등 연예인, 그리고 한완상 전 부총리, 오영교 전 행자부장관, 문용린 서울시교육감 등 정·관계 인사가 두루 산다. 고재희 대동풍수학회장은 “명당은 이곳에 산다고 누구를 갑자기 부자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좋은 평판과 함께 부침없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운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 사는 명사를 보면 이런 정의가 대체로 들어맞는다. 특히 연예인의 경우 대체로 반짝 인기가 아니라 슬럼프 없이 롱런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71~76동은 왜 명당일까.

 김민철 교수는 “압구정 땅의 기운이 모여있는 혈(穴)과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조선 세조 때의 한명회가 정자(압구정)를 지은 터도 이 자리다. 강현숙 천우부동산중개사무소 실장은 “도로에서 떨어져 있어 조용한 71~74동을 선호한다”며 “이곳 주민은 다들 성공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부동산 업자는 “73~76동이 명당”이라며 “특히 73, 74동(158㎡)은 같은 크기인 단지 내 다른 동보다 1억~1억5000만원이 더 비싸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길지(吉地) 골라 거주

겸재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 옛날 압구정 모습이 보인다.

양 교수는 특히 76동을 핵심으로 꼽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한때 여기 살았다. 현대건설 회장 시절인 1980년부터 여기 살다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몇차례 이사 끝에 2002년 서울시장 당선 당시는 종로구 가회동으로 이주했다. 가회동 역시 서울의 손꼽히는 명당이다.

 최 전 교수는 “이 일대는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 창덕궁의 주산인 응봉을 연결하는 선의 남측면으로, 양지바르고 남산의 전망도 좋아 양기풍수(陽氣風水)에서 말하는 길지”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이 풍수를 고려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길지를 골라 다닌 셈이다.

 대치동의 경우는 어떨까. 풍수 전문가들은 미도아파트에선 명당 동을 108~111동·205~206동이라고 꼽았다. 이유는 현대식 좌청룡·우백호다. 김 교수나 최 전 교수 모두 “미도아파트는 사방이 큰 대로로 둘러싸였는데 대로변과 맞닿은 동들이 소음과 탁한 기운을 막는 좌청룡·우백호 역할을 해준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양재천변에 있는 111동이 물 기운을 받아 재물운이 따른다”고 덧붙였다.

 미도아파트에는 정계 인사들이 많이 거주했다. 권재진 전 법무부장관·이원종 전 서울시장·오장섭 전 건설교통부 장관 등이다. 박승덕 한국 과학기술원이사도 이 구역에 산다. 문화계 인사 중에는 임권택 영화감독이 1990년대에 명당 동으로 꼽힌 곳에 거주했다. 이후 ‘장군의아들’(1990)이 흥행 대박을 쳤고 ‘서편제’(1993)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기도 했다.

 도곡동 타워팰리스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가장 극명하게 엇갈리는 곳이다. 양 교수는 “태양빛을 가장 많이 받아 양기를 다 빨아들이기 때문에 제일 높은 G동이 좋다”고 말했다. 반면 박시익 명당건축사 사무소 대표는 A~D동을 꼽았다. “정사각형이나 둥근 형태의 건물이 기가 잘 모여 풍수적으로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E·F동을 꼽았다. “E·F동이 음양 형태로 서로를 보완해 풍수적으로 안정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전문가 사이에서도 엇갈리는 걸 보면 역시 최 전 교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풍수는 좋은 땅, 나쁜 땅을 가리는 게 아니라 나에게 맞는 땅, 맞지 않는 땅을 가리는 것이다. 교통 편한 게 제일인 사람에게 산간 벽지 명당을 줘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학군·교통이 현대적 의미에서 명당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건 이런 이유다.”

글=안혜리·유성운·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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