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폭침 후 개성공단 성장세 멈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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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건 북한 대남담당 비서가 8일 개성을 방문해 “북측 근로자들을 철수시킨다”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개성공단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2004년 12월 첫 생산품을 출하한 지 9년, 시범단지 착공식 10주년(6월 30일)을 두 달 앞두고다.

 북한군이 주둔하던 지역에 우리 기업들이 북한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활동을 하는 역발상의 산물인 개성공단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김대중(DJ) 정부가 남북 화해협력 정책의 일환으로 야심 차게 추진하던 개성공단은 2003년 6월 30일 첫 삽을 떴다. 이후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남측 전력 송전, 1400여 회선의 전화 개통, 상·하수도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SOC)은 물론이고 호텔·식당 건립 등 공단 내 우리 근로자들의 생활환경 개선 사업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북한 관계자는 “이제 개성공단은 남측 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지난 1월 말 기준 123개의 업체가 누적생산액 20억1703만 달러(2조3100여억원)를 기록했다. 북한 근로자도 5만3397명으로 개성 인근 지역의 핏줄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명박(MB) 정부 들어 개성공단의 시련은 시작됐다. 대북 선제타격 발언과 전단 살포에 따라 북한이 반발하면서다. 2008년 6월 24일 북한은 공단에서 남측으로의 인력과 물자의 통행시간을 제한했다. 그해 12월에는 당시 국방위 정책국장이던 김영철 현 정찰총국장을 개성공단에 파견해 남측 상주 인력을 대폭 감축하는 소위 12·1 조치를 취했다. 공단 내 우리 근로자들의 상주 인력을 880명으로 감축하고 개성을 왕래하는 통행 가능 인원을 대폭 줄이는 게 골자였다.

 북한은 이듬해 3월엔 한·미 연합훈련인 키 리졸브 훈련을 빌미로 세 차례 육로 통행을 차단한 데 이어 현대아산 근로자 유모씨를 감금, 4개월여 만에 풀어주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성장일로에 있던 개성공단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사건으로 성장세를 멈췄다. 당시 우리 정부는 북한 지역에 대한 신규 투자를 금지하는 5·24 조치를 취했다.

 제자리걸음을 지속하던 공단은 지난달 27일 북한이 남북 간 군 통신선 차단과 북한 지도부에 대한 존엄을 훼손시킬 경우 공단을 폐쇄하겠다고 압박하며 위기가 고조됐다. 북한이 돈줄인 개성공단을 닫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에 대한 반발이었다. 급기야 북한은 8일 남북관계 총책인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를 공단에 보내 잠정 폐쇄를 통보했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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