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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총리, 못 찾겠다 꾀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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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논설위원

“결정적인 계기는 정홍원 총리가 만들었다.” 8일자 조간신문들에 실린 기사의 한 구절이다. 소액 공공사업을 중소기업에만 준다는 뉴스다. 기획재정부와 중소기업청의 이견으로 안 되던 게 정 총리의 조정으로 빛을 봤다는 내용이다. 기사 앞부분은 정책의 내용을, 뒷부분은 총리의 미담을 소개하고 있다. 중소기업인에겐 흐뭇한 일이요, 담당 공무원들에겐 보람찬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낯간지럽지 않나. 총리실이 굳이 정 총리의 역할을 언론에 띄운 게 말이다. 총리의 당연한 업무를 활약상으로 강조했으니, 되레 그의 옅은 존재감을 방증해준 꼴이 됐다. 아마 책임총리라는 ‘맞지 않는 옷’에 대한 부담감에서 나온 일 아닌가 싶다.

 책임총리가 도대체 뭔가. 어려운 말을 꺼낼 필요도 없다. 총리가 기자를 얼마나 몰고 다니는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힘세고, 소신 있고, 굵직한 일을 결정하면 기자들이 알아서 떼로 몰려든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마크맨이 따라붙는다. 언론사마다 고참·중참·신참 기자들이 편대비행을 하며 총리실을 샅샅이 훑는다. 상상력을 발휘해 문재인이 대통령이고 안철수가 총리였다면 어땠을까. 총리실 기자실은 청와대 다음으로 미어터졌을 거다.

 그럼 현실은 어떤가. 장관 후보자들이 줄줄이 낙마했지만 정 총리가 책임을 지진 않는다. 그가 실질적인 임명제청권을 행사했다면 야당이 그를 가만 놔뒀겠나. 또 세종시의 총리실 기자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라는 소식 역시 듣지 못했다. 언론사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출입기자 한두 명이 다른 부처와 함께 총리실을 커버하고 있다.

 뉴스 생산 건수로도 총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구글의 뉴스 검색창에 ‘정홍원 총리’를 입력하면 7100여 건이 뜬다. 이에 비해 ‘현오석 부총리’와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으로 검색된 뉴스는 각각 1만 건이 넘는다. 또 ‘윤진숙 장관 후보’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2만6700여 건이 검색된다. 물론 다른 포털에선 검색 순위가 바뀌기도 하지만, 정 총리가 압도적인 뉴스 메이커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총리실은 책임총리를 보좌한다며 직급만 높여놨다. 종전 두 자리였던 차관이 지금은 비서실장과 국무조정실 1, 2차장으로 셋이 됐다. 국민들은 있지도 않은 책임총리를 향해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칠 판인데, 공무원들은 거나하게 내부 승진 잔치를 벌였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지 않았나.

 그렇다고 정 총리를 탓하는 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짓이다. 정운찬 전 총리는 얼마 전 라디오 방송에서 “책임총리라는 게 무슨 권한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지고 나가라는 얘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냉소적이지만 그게 현실에 가깝다. 우리 정치 현실상 책임총리는 획득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이 허용해야 비로소 가능한 위치다.

 지난해 김황식 전 총리는 사석에서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미리 알고 시작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하고 말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론 장수 총리가 됐지만, 처음부터 그처럼 오래 할 줄 알았다면 그의 행동 반경은 적잖이 달라졌을 것이다. 총리에도 임기를 두자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1년은 너무 짧고, 2년씩 하자니 대통령 임기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래저래 2년 반 또는 ‘2년+α’로 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꼭 헌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부조직법에 넣어도 되고, 번거로우면 대통령이 선언해도 충분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총리제를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집권하니 생각이 바뀐 걸까. 결자(結者)만 했지 해지(解之)를 하지 않고 있다. 하기야 미결제 약속어음이 어디 이뿐인가. 탕평은 물 건너갔고, 낙하산은 하늘을 덮을 기세다. 이 판국에 책임총리 같은 ‘사소한 일’로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릴 이가 누가 있겠나. 책임총리란 말, 힘없는 민초들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하자. 혈압이라도 덜 오르게 말이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