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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으로 시작한 책 읽어주는 할머니 지금은 940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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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은퇴 후 아이들을 위한 인성교육 봉사에 나서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수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얻은 지혜를 아이들의 올바른 인성 형성에 쓰는 일종의 ‘재능기부’다. 이용태(80) 전 삼보컴퓨터 회장은 2005년 퇴임 후 인성교육 전도사가 됐다. 그의 독특한 변신은 은퇴 후 손주들과 자주 만나면서 시작됐다. “공부는 잘하니?” “네….” “학교는 잘 다니냐?” “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손주들을 볼 시간이 많아졌지만 막상 만나게 되면 일상적인 대화도 쉽지 않았다. 그는 10명의 손주들을 불러놓고 한 달에 한 번씩 인성교육을 시작했다. 살며 겪었던 교훈이 될 만한 얘기들을 들려주고 각자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 자유로운 토론이 끝난 뒤에는 한 가지 실천 주제를 정해 한 달 동안 지키도록 약속했고 수년 동안 이를 반복했다. 이렇게 터득한 노하우를 2011년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책으로 펴냈다. 7년 동안 이 전 회장은 700여 개 학교를 돌며 인성교육 강의를 했다. 그는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인성이 뛰어난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할머니들이 유치원을 찾아가 전래동화를 들려주며 인성교육을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도 인기다.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 얘기를 들려주던 할머니들의 전통적인 인성교육법을 현대식으로 되살렸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려주고 “누구처럼 살고 싶어요?”라고 질문한 뒤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하도록 하면서 바른 인성을 체득하게 하는 방식이다. 2009년 경북 일부 지역에서 30명의 할머니로 시작한 이 사업은 전국 940명으로 확대됐다. 사업을 주관하는 국학진흥원 김병일 원장은 “처음엔 아이들이 할머니 얘기에 관심을 가질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이야기 할머니를 만난 뒤 아이들이 달라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기업도 시니어들의 인성교육을 지원하고 나섰다. KT는 올 하반기부터 은퇴자 재능기부 프로그램인 ‘시소’를 시작한다. 퇴직 교사·공무원 등 1000명을 모집해 저소득층 어린이들의 멘토로 양성하는 것이다. KT 최재근 CSV(공유가치창출)단 전무는 “퇴직자들의 인생 경험과 노하우가 아이들의 꿈과 인성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재현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장은 “맞벌이와 핵가족화로 가정 내 인성교육이 힘든 상황에서 시니어들의 재능기부는 아이들의 인성교육에 큰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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