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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이냐 투쟁이냐 … 기로에 선 3000만 중동의 집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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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쿠르드인들이 지난달 17일 쿠르드족의 새해인 ‘누르즈(Newroz)’를 맞아 터키 내 친(親)쿠르드 정당인 평화민주당 깃발을 흔들고 있다. [이스탄불 로이터=뉴시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터키 특수감옥에서 흘러나온 발표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99년 체포돼 14년째 수감 중인 쿠르드족 반군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이 “이제는 무기가 침묵하고 사상과 정치가 말해야 할 때”라며 정전을 선언했다. 30년간 이어진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한다는 결정이었다.

 “터키 현대사에서 가장 민주적인 움직임이 될 협상이 시작됐다”(터키 정치평론가 아슬리 아이딘타스바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2011년 세 번째 집권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터키 민주화와 분쟁 종식을 자신의 정치 업적으로 내걸고 있다. 터키 인구의 18%를 차지하면서 화약고 같은 존재인 쿠르드족과의 평화는 내년 대통령선거 출마를 노리는 그에게 중요한 과제다.

 오잘란 선언으로부터 보름, 표면적으로는 실무협상이 진행되는 듯 보인다. AP통신은 지난 3일 에르도안 총리가 평화협상을 도와줄 64명의 전문가 그룹을 만들면서 사태 해결에 박차를 가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살얼음이다. 오잘란이 속한 쿠르드노동자당(PKK)은 더 이상 독립이나 자치권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터키 정체성을 강조하는 현행 헌법을 개정해 인종적 정체성이 명시되지 않은 새로운 평등 헌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큰 변화 없이 빠른 평화협상을 원하는 에르도안 총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다. 이런 와중에 오잘란이 PKK 무장대원들에게 비무장 상태로 터키에서 떠날 것을 요청했다는 3일 로이터의 보도를 둘러싸고 PKK 내부에서 충돌이 벌어졌다는 소식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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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와 쿠르드의 평화협상은 역설적으로 주변 분쟁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최근에는 2년 넘게 이어진 시리아 내전이 영향을 줬다. 시리아 북부에 거주하던 쿠르드족이 난민 신세가 돼 터키로 넘어오면서 ‘분쟁의 스필 오버(Spill-over)’를 초래하고 있다. 오잘란 체포 당시 전쟁 직전까지 갈 만큼 반터키 성향이 강한 시리아 쿠르드족이다. 이들이 터키 내 쿠르드 강경파와 연합할 가능성을 우려해 터키 정부가 집안단속을 서두르고 있다.

 이라크전 10주년을 맞은 이라크 쿠르드족도 중요한 변수다. 이라크 다수 종파인 시아파와 소수 종파인 수니파가 알력을 빚는 사이 쿠르드족은 지역 안정을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자치권을 확대하려 한다. 지난 5일엔 국제석유시장에서 의미심장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지역정부(KRG)가 쿠르드 지역에서 채굴한 원유를 직접 국제시장에 팔았다. 3만t에 달하는 이 원유는 영국·터키 합작법인 제넬에너지가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인 타크타크 유정에서 채취해 터키 남부로 실어 나른 것이다. 5일 시세로 2200만 달러(약 250억원)어치에 해당한다.

 이라크 정부는 KRG의 직접 원유 수출을 금지해 왔다. KRG의 원유 수출이 이라크로부터의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원유가 많이 매장된 쿠르드 지역이 이라크에서 떨어져 나갈 경우 이라크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불안하게 이어져 온 국가 통합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쿠르드족의 분리독립에 대한 우려가 터키로 하여금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상황이다. KRG는 역사적으로 적대적이었던 터키와 지난해부터 석유 수출 방안까지 논의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하지만 터키·쿠르드 협상을 둘러싼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93년과 99년 정전을 선언했다 깨졌던 선례가 있다. 평화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쿠르드 강경세력의 잇따른 테러도 문제다. 쿠르드인들은 지역이 불안해지면 주변국들이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을까 우려한다. 터키·이란·이라크 등은 국민 불만이 고조될 때면 쿠르드족 박해로 출구를 찾은 바 있다. 쿠르드족이 기존 국가에 동화되지 않고 분리 독립운동을 이어온 것도 이들의 박해를 끊이지 않게 만들었다. 안정된 자치를 유지하는 이라크 쿠르드족조차 80년대 대학살의 경험 때문에 주변국들을 자극할 수 있는 독립 이야기는 자제하고 있다. 이란·시리아와 함께 중동의 뇌관으로 불리는 쿠르디스탄의 향배에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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