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품격 내용 모두 미달" 혹 떼려다 혹 붙인 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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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오전 청와대 김행 대변인의 인사 검증 사과 장면을 지켜본 이들은 정파·세대에 관계없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사과가 갖춰야 할 품격과 내용·형식이 모두 함량 부족이어서다.

김 대변인이 발표문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17초. 거기에 작금의 상황에 대한 해명을 담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민들이 듣고 싶은 건 박근혜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과 취임 뒤 국무총리와 장ㆍ차관 후보자 6명이 잇따라 낙마한 데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토로였다. 그런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어떤 조사와 후속 조치를 취했는지 궁금했다. 화난 민심을 달래는 사과 발언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 걸 두루 의식했다면 17초짜리 사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과 발언이 짧다는 것만 탓할 건 아니다. 짧은 말에도 얼마든지 진정성과 무게감을 담을 수 있다. 그러려면 품격이 뒷받침돼야 한다. 박 대통령이 무게를 갖춰 짧게 사과한 뒤 인사 실무 책임자인 허태열 비서실장이 보충 설명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대통령이 말할 내용을 비서실장 명의로 대변인에게 대독하도록 한 것은 백 보를 양보해도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마지못한 사과라는 느낌을 준다.

19세기 후반 영국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사과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변명“이라고 말했다. 시인 랠프 에머슨은 “분별 있는 자는 사과하는 법이 없다”라고 했다. 그들이 살던 19세기엔 사과를 경원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21세기 10대 무역 대국인 대한민국 대통령에겐 좀 더 세련된 매너가 필요하다. 진정성과 함께 사과의 방식·기법 등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야당인 민주통합당 측이 “사과의 주체와 형식도 잘못됐고 알맹이도 없는 하나 마나 한 사과”라고 주장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번처럼 진정성 없는 사과를 할 바엔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청와대 참모진이 그 정도의 형식과 표현으로 민심을 달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런 안일함이 더 걱정스럽다.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는 정치 감각부터 되새겨 보길 권한다. 만에 하나 문제의식을 갖고도 직언을 하지 못했다면 참모로서의 자격이 의심스럽다. 한마디로 이번 사과는 청와대의 불통(不通) 이미지만 굳혀 놓은 꼴이다.

박근혜 정부는 안보 위기, 경제 위기라는 ‘쌍둥이 위기’를 겪고 있다. 여기에 ‘신뢰 위기’까지 겹친다면 국정 추진 동력은 크게 상처받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민심을 보듬고 국정철학을 제대로 전달하는 게 시급하다. 아직도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기대하는 이가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진정성 없는 사과가 또 다른 사과를 부른다면 그런 기대감도 희미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