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보름달 둥실 … 청사초롱 불 밝혀 월궁 거닐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6호 09면

낙선재 뒤뜰 화계 너머로 달구경을 하는 관람객들.

둥근 달이 뜨면 궁도 눈을 뜬다.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지만 이제는 사람의 온기를 잃은 곳. 월궁(月宮)의 신선처럼 유유자적한 삶을 바랐던 저들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한 때문일까. 낮 동안 박제된 역사의 풍경화로 굳어버린 시공간이 만월(滿月)의 신묘한 기운을 받아 다시 조심스레 흘러간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과 조경으로 왕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궁궐이자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매월 보름달을 배경으로 오백 년의 이야기를 토해낸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2010년부터 시작한 ‘창덕궁 달빛기행’이다. 돈화문~금천교~인정전~낙선재~부용지~연경당에 이르는 창덕궁 핵심 코스를 따라 걸으며 전통 공연까지 관람하는 2시간 동안의 야간 궁궐 체험. 이미 입소문을 타 지난해에는 인터넷 판매 개시 2분 만에 1000장이 모두 매진됐다. 올해는 횟수를 늘려 내국인 대상 18회, 외국인 대상 10회를 진행한다. 3~5월, 8~10월 보름 무렵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3월과 10월은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열린다. (8~10월 티켓은 8월초 판매 예정)
어스름 달빛 아래 청사초롱을 손에 든 우리는 시간의 여행자. 금지된 문을 열고 오래된 돌다리를 건너 바깥 세상의 소음이 사라진 고요한 어둠을 가르고 나선 발걸음은 이미 달 기운에 홀렸다.

올해 첫 ‘창덕궁 달빛 기행’ 동행기

1 불로문을 지나 연경당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숙종이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애련정은 액자의 프레임 같은 낙양창을 두어, 정자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면 마치 화려한 낙양창에 담긴 풍경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2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청사초롱 3 낙선재 상량정 언덕 꽃담에 뚫린 동그란 만월문을 통과해 신선이 사는 월궁, 후원으로 향하는 사람들. 4 낙선재 뒤뜰로 나가는 아담한 문은 앙증맞은 아치형이다.

입장권 판매 개시하자마자 매진
음력 2월 15일인 26일 오후 7시 창덕궁 돈화문 앞. 아직 어둠이 내리진 않았지만 보름달은 벌써 저만치 떠있다. ‘2013 창덕궁 달빛기행’ 첫날 행사에 모인 100명의 참가자가 스무 명씩 다섯 조로 나뉘어 줄을 섰다. 티켓 오픈과 동시에 빛의 속도로 예매에 성공한 바지런한 사람들이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 커플부터 사이 좋은 엄마와 딸, 중년여성 답사모임, 알콩달콩 신혼부부 등 다양한 참가자 가운데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젊은 연인이 눈에 띈다. 한복 동호회 ‘한복 입기 좋은 날’ 회원이라는 김은선(29)·송성국(30)씨 커플은 “궁에 오는 날이야말로 한복 입기 좋은 날 아니냐”며 직접 지어 입었다는 한복맵시를 뽐낸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가라는 이들은 “어둡고 조용한 속에서 청사초롱 불빛만 의지해 궁을 거니는 느낌이 정말 좋다. 꽃피는 5월에도 단체 예매를 해놨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라며 유난히 들뜬 분위기다.
근엄한 표정의 수문장들이 버티고 선 돈화문 안쪽엔 분명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부푼다. 색감 고운 빨간 두루마기를 단정히 두르고 마중 나온 입담 좋은 해설사를 따라 별천지로 조심스레 들어선다. 문안에서 건네 받는 청사초롱은 달빛에만 의지하는 야간 기행의 필수품. 밤길을 비추는 길잡이인 동시에 어둠 속에 깊이 잠든 궁궐 구석구석을 스스로 깨우는 열쇠가 된다.
첫 번째 만나는 보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금천교.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란다. 임금을 만날 땐 금천(禁川)을 지나며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기에 모든 궁에 있는 다리지만,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시내에 놓인 다리’라 하여 ‘錦川橋’라 불렸다고. 비단 같은 냇물에 비친 달을 보며 입장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아쉽게도 날이 가문 탓에 물이 없어 상상만으로 만족했다.
진선문·인정문을 통과하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 자태를 드러낸다. 국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 주요 행사가 벌어지던 대외적인 공간이다. 왕이 앉았던 용상과 일월오봉도가 은은한 조명 속에 온기를 품고 다가온다. 대낮에는 지나간 역사의 껍데기 정도로 보였던 물건들이 달빛을 받자 마치 사극 속으로 들어온 양 왕이 금방이라도 들어와 앉을 듯한 생동하는 위엄이 감돈다.

헌종과 경빈 김씨의 안타까운 로맨스 깃든 낙선재
왕이 가장 오래 머물던 공간이라는 침전이자 편전 희정당을 거쳐 도달한 낙선재는 사연도 많다. 조선왕조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가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간절히 그리워했고,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머물던 곳이라니 마음이 짠하다. 여인의 공간답게 건축에도 아기자기한 디테일이 살아 있다. 내부에 조명을 넣어 27종 다양한 문창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연출이 야간 기행의 운치를 더한다.
낙선재가 흥미로운 것은 왕의 안타까운 로맨스가 깃들어 있기 때문. 주인공은 24대 임금 헌종이다. 대비에게 절대 권한이 있던 왕비 간택에 이례적으로 개입했던 헌종이 첫눈에 반한 여인을 중전으로 들이지 못하자 3년 후 기어이 후궁으로 들인 것이 경빈 김씨였다. 헌종은 경빈과 신접살림을 위해 낙선재를 짓고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는데, 헌종이 2년 만에 승하하는 바람에 그 사랑이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는 애석한 사연이다. 각별히 아름다운 꽃담에 새겨진 경빈 김씨의 다산을 기원하는 포도그림과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수(壽), 복(福) 문양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헌종의 못다한 사랑은 아쉽지만 달 구경에는 이만한 명소가 없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함 덕분에 은은한 달빛과 더욱 잘 어울리는 낙선재엔 우리 건축에서 보기 드문 커다란 만월문이 두 개나 있다. 평소엔 개방하지 않는 뒤뜰로 돌아가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시원하게 뚫린 만월문이 실내에서 보름달의 정기를 듬뿍 받아들이고 있다.
상량정 뒷동산은 궐에서 달과 가장 가까운 곳. 힘겹게 올라온 기억이 전혀 없는데 담장 너머로 도심의 빌딩 숲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기적 같은 언덕 위에선 쟁반같이 둥근 달이 진정 손에 잡힐 듯하다.
“푸른 하늘에 달이 있어 얼마나 되었는가/ 나 술잔을 멈추고 한번 물어보노라/ 사람이 밝은 달을 기어오를 수는 없으니/ 달이 도리어 사람을 따라오는구나…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 다 같이 달을 보고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오직 바라노라 노래하고 술마실 동안은/ 달빛이 오랫동안 술잔을 비추어주기를.”
해설사가 이백의 시 ‘파주문월(把酒問月)’을 읊는 것은 달에게 소원을 빌 시간을 주려는 뜻이지만, 술잔만 있으면 보름달을 마셔보는 운치를 맛볼 수도 있을 텐데…. 참가자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들이다.
언덕을 내려와 창덕궁 후원으로 통하는 꽃담에도 동그란 만월문이 뚫렸다. 옛사람들은 달 속에 신선이 산다고 여겼다니 우리도 달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으로 만월문을 통과해 왕들의 놀이터, 후원으로 향한다. 후원으로 가는 언덕길에는 낮 개방 시간이 끝나자마자 해설사들이 일일이 담장에 매달았다는 청사초롱이 밤길을 밝혀준다.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린 산책코스에 골짜기마다 연못과 정자를 둬 왕이 쉬어가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옥류천 취한정에서 숙종이 읊었다는 ‘어제취한정시(御製翠寒亭詩)’, 관람지 존덕정에 걸린 정조의 시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등 유난히 후원에서 달을 읊은 왕들의 시가 많은 것도 이곳을 달나라로 여겼던 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5 연경당에서의 전통예술공연. 연경당 입구에서 떡과 한과가 든 예쁜 주머니와 전통차를 건네받아 허기를 달래며 공연을 감상한다. 6 달빛기행의 백미 부용지 감상에는 거문고 독주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운치를 더한다. 7 낙선재 뒤뜰에서 이어진 상량정 언덕에 서면 보름달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있다.

궁중무·판소리·국악관현악 … 공연으로 마무리
언덕길 끝자락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는 달빛기행의 하이라이트인 부용지에 다 왔다는 신호다. 부용지는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에 하늘을 상징하는 동그란 섬이 떠 있고 인간을 상징하는 정자가 발을 담그고 있는 ‘창덕궁 최고의 조경’이지만, 낮에는 연못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것이 사실. 투명한 자수정처럼 검은 물속으로 주변 풍경을 빨아들이는 한밤의 부용지가 도저히 같은 수질로 보이지 않는 것은 온전히 달빛의 힘이다. 연못 건너편 주합루가 은근한 조명을 받았을 뿐인데도 물에 비친 모습은 숭고한 황금빛으로 물든 신비한 월궁이다. 보름달밤에만 모습을 보여주는 월궁의 품위는 진짜 금칠을 한 교토의 금각사에 비할 바 아니다. 보름달이 둥실 뜬 연못에 배를 띄운 임금의 마음은 정녕 신선의 경지 아니었을까.
부용지를 뒤로 하고 통돌을 깎아 세워 ‘늙지 않는 문’이라는 불로문을 지나 애련지를 거치면 연경당에 이른다. 이제 달빛기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통예술공연을 감상할 시간. 고종과 순종 시절 연회공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사대부 가옥의 구조를 본떠 지은 집으로, 낙선재처럼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공간이다. 집 앞에는 은하수에 걸치는 오작교와 달의 정령 두꺼비가 새겨진 석분이 놓였고 대문에는 ‘장락문(長樂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중국 전설에 불사약을 가진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살던 달 속 신선의 궁궐 ‘장락궁’에서 가져 온 이름이다. 신선이 노니는 동산 후원 중에서도 연경당을 신선이 사는 집에 비유한 셈이다.
효명세자는 연회와 관련한 예술을 중시해 순조 등극 30년 기념 연회 등 각종 궁중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많은 악장과 가사를 만들었다. 특히 ‘영지무’ ‘연화무’ 등 궁중무용인 정재무(呈才舞) 후기양식에 뚜렷한 예술적 업적을 남겼다. 그의 숨결이 깃든 연경당에서의 공연관람은 그래서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공연은 효명세자가 순원왕후의 탄신 40년을 기념해 지은 춤 ‘춘앵무’로 문을 열어 사람 소리를 닮아 가슴 저미는 아쟁산조로 이어지고, 판소리 사랑가에 이르면 관객들도 하나가 된다. 국악관현악 ‘Fly to the Sky’와 ‘아리랑환상곡’이 신명나게 울려 퍼지면 말로 설명할 필요도, 재간도 없는 ‘한국의 멋’으로 한바탕 샤워한 느낌이다.
월궁을 나와 속세로 돌아갈 시간. 경기도에서 온 정일범(39)·조진영(32)씨 부부는 “이제 시작인 것 같은데 끝나 아쉽다”며 “깜깜해서 아무도 못 찾을 테니 숨어서 돌아다니고 싶다. 꽃피는 계절에 꼭 다시 와야겠다”면서 미련 가득한 얼굴이다. 달빛을 등지고 내려오는 숲길, 문득 우리가 들고 있는 청사초롱 불빛의 행렬이야말로 이 달빛기행의 최고의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보름달 속으로 풍덩 들어가 월궁에 사는 신선이 누리던 멋과 여유를 맛본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 어제는 분명히 없었던 등불을 하나씩 밝힌 채 내일로 걸어가고 있을 테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