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쇼가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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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울패션위크]

30일 막을 내린 2013 춘계 서울패션위크에서는 해외 컬렉션과는 사뭇 다른 장면이 연출됐다.

여의도 IFC 행사장 입구엔 스마트폰과 사인지를 든 교복차림 여고생들이 모여 연예인은 물론 이수혁·김우빈 같은 스타급 모델들이 등장할 때마다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지금껏 서울패션위크를 찾는 사람 대다수가 패션 관련 학과 대학생들이었다면 이젠 청소년들로까지 영역이 넓어진 것이다.

한 중견 디자이너의 패션쇼 관람석 맨 앞줄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 어린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런웨이로 진출하려 하자 옆에 앉은 어른이 이를 막느라 아이의 손을 연신 잡아끌었다. 진행요원 역시 진땀을 뺐다.

박원순 시장이 지난 시즌부터 “패션위크를 시민축제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한 뒤 나타난 광경들이다. ‘시민이 낸 세금으로’ 여는 행사를 시민이 즐길 수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바이어와 기자가 대부분인 해외 패션위크와는 좀 달라야 한다는 논리다. 청소년도 볼 수 있는 패션쇼가 되고 나니 흥행성·대중성에서는 방송국 가요 프로그램 못지 않게 됐다.

하지만 그 ‘시민이 낸 세금으로’ 열리는 행사라는 데서 의문이 생긴다. 패션위크의 목적은 분명 한국 디자이너를 해외에 알리고, 우수한 한국 브랜드를 세계적 명품으로 키워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자는 것이다. 패션쇼는 그냥 볼거리가 아닌 치열한 산업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자체가 나서서 ‘구멍가게’에 불과한 국내 디자이너들을 말 그대로 ‘육성’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 목적이 아니라면 연간 31억원(올해 기준)이라는 시민의 세금이 책정될 이유가 없다. 서울시가 주최하는 어떤 축제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쓸까.

미국 패션잡지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를 소재로 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2002년 오스카 드 라 렌타가 세룰리언 블루 가운을 발표했어. 그 후에 연달아 여덟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에 세룰리언 블루가 등장하며 전성기를 열었지. 그 유행이 끝나자 세룰리언 블루는 백화점에서 할인매장으로, 다시 끔찍한 캐주얼 코너로 넘어가서 결국 너에게까지 도달한 거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세룰리언 블루는 수백만 달러어치의 가치와 일자리를 창출했지.”

주인공(메릴 스트리프 분)이 막내 사원(앤 해서웨이 분)에게 해준 이 말은 패션이 산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이번 ‘시민축제’에도 중국에서 바이어들이 몰려 왔고, 해외 유명 패셔니스타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축제의 규모에 치중해 6일간 75개나 되는 쇼가 열리고, 그것도 여의도와 한남동 두 군데로 나뉘어 진행되다 보니(이번엔 디자이너 20명은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독립적으로 패션쇼를 진행했다) 바이어들이 동선에 맞춰 쇼를 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두 개의 메인쇼가 맞붙어 있을 땐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브랜드들이 부스를 차려 놓고 수주 상담을 하는 페어 행사장에는 막상 인적이 끊겼다. “바이어들을 일부러 페어장으로 유도해야 할 정도”라는 진행 요원의 푸념이 들려왔다. 페어 부스를 돌아다녀 보니 직원들 입에선 “심심해”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3년 전 싱가포르 패션위크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의 설명은 간단했다. 자국 브랜드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만큼 각국 디자이너들을 불러들여 큰 판을 벌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쇼는 최소화하는 대신 패션 바이어들이 꼭 찾아 오는 페어 중심으로 만들겠다고 단언했다.

서울패션위크의 정체성은 과연 뭘까. 한 공무원은 “행사 담당 공무원이 1년마다, 주관사 역시 매년 바뀌는 상황에서 시장 아닌 누가 섣불리 노선을 정하고, 성공을 보장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짐작하건대 서울시의 목표는 ‘시민축제로 승화되는 세계 5대 패션위크’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진 매번 대관장소 선정에 골치를 썩고, 쇼장에서 초대장과 VIP티켓·일반 좌석이 뒤죽박죽돼 돈 내고도 자리를 구하지 못한 관객과 신경전을 벌이고, 공짜 비행기로 왔다가 지갑은 열지 않고 돌아가는 바이어들을 보는 답답함은 계속 감수해야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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