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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쟁

성범죄 처벌 강화, 어떻게 봐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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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강간 등 성범죄 처벌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한변협이 “성폭력범죄에 대한 법정형 상향 추세가 ‘형벌은 범죄와 범죄자의 책임에 상등하는 정도에 그쳐야 한다’는 이념에 비춰 적절한지 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엄격한 처벌로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야 할 때”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두 갈래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 ‘인격살인’ 인식 갖도록 엄격한 대응 필요하다

안준성
미국변호사·경희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그간 법원이 성범죄자들에게 내려온 ‘솜방망이’ 판결이 엄벌을 원하는 국민의 법감정과 상당한 괴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최근 국민 법감정을 반영해 성범죄 법정형 상향이 이뤄진 것은 바람직한 변화라고 본다. 이에 “지나친 처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은 성급한 감이 없지 않다.

 처벌 강화에 대한 재검토 논의는 자칫 ‘성범죄는 중대 범죄가 아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아직 우리 사회의 인식은 성범죄에 관용적인 편에 속한다. 성범죄가 한 여성의 삶을 벼랑으로 내모는 ‘인격살인’이란 점에서 보다 엄격하게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 강간은 물론 성추행에 대해서도 큰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주지시켜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성범죄 억제를 위한 제도 재정비가 오히려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여러 번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범죄자, 즉 경합범에 대한 가중처벌 기준이 너무 낮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형법 제38조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금고)을 제외한 경우 동종(同種)의 형은 가장 중한 죄가 정한 장기의 2분의 1까지 가중처벌한다. 같은 성범죄를 수십 번 저질러도 법정최고형의 절반까지만 가중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결과 형량이 작지만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범죄는 흡수돼 사라져버린다.

 미국에서는 법정최고형이 상대적으로 낮은 범죄 등을 강력히 처벌할 수 있는 ‘형 순차집행(consecutive sentence)’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기초질서 확립과 범죄 억제 차원에서 각각 독립된 범죄로 보고 각 범죄의 형량을 합산한 뒤 연속해서 집행하는 것이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복수 피해자가 있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 판사는 반드시 법정최고형으로 순차집행을 선고해야 한다. 판사의 재량 사항이 아니라 강제 규정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 조지아주의 한 TV 방송사 사장이 아동학대 음란물 소지죄로 징역 1000년을 선고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자신의 컴퓨터에서 사진 2만5000여 장과 동영상 700여 개가 발견된 뒤 아동성학대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조지아주 형법상 18세 미만의 미성년자의 성행위 묘사 자료 소지는 아동성학대 유형 가운데 하나로 5년 이상 2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배심원단이 유죄평결을 한 뒤 담당 판사가 50개의 혐의에 대해 법정최고형인 징역 20년씩을 합산해 1000년을 선고한 것이다. 만약 유사한 사건이 국내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처벌될까.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8조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 소지죄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성범죄 처벌의 범죄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도 형 순차집행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현행 가중 처벌 제도로는 한계가 있다. 또 성범죄에 한해선 유기징역의 기간 제한을 없애고 법률상 감경 사유를 폐지해 엄벌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동음란물 배포 같은 관련 범죄 법정형도 대폭 올림으로써 ‘성범죄 공화국’이란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두순 사건과 같은 충격적인 아동성폭행 사건이 터질 때마다 뒤늦게 야단법석을 피우는 일이 반복돼왔다. 이젠 선제적인 자세로 성범죄 문제에 접근해야 할 때다. 법조계에서도 성범죄를 ‘국민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안 준 성 미국변호사·경희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 형량 인플레는 곤란 … 교정 강화해야

류여해
한국사법교육원 교수

지난 월요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살인죄 형량을 대폭 상향했다. 국회가 성범죄 법정형을 높인 데 이어 대법원도 양형(형량결정)기준을 크게 강화하면서 살인죄와 성범죄 간에 ‘형량 역전’ 현상이 일어난 데 따른 것이다. 이러한 양형기준의 변화는 성범죄 등에 대한 국민의 법감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주변의 성범죄 피해 여성들을 만나 손을 잡아보면 아직도 수치심과 전율이 느껴진다. 같은 여성으로서 나도 성범죄자를 모두 펄펄 끓는 물에 넣어서 벌하고 싶다. 피해자와 가족들은 성범죄자를 사형에 처하거나 평생 외딴섬에 가두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법에는 법의 정신이 있다. 죄형법정주의, 명확성의 원칙, 법률 불소급 원칙 등은 오랜 기간 지켜져 내려온, 그리고 지켜져야 할 법의 기본 정신이다. 법은 우리 자신을 보호할 최선의 수단이자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이 무너지면 분명 우리 발목을 잡을 것이다. 범죄에 적정한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도 법의 중요한 정신이요, 원칙이다.

 그런데 성범죄에 관해서는 원칙보다 감성이 앞서고 있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강력 성범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이 들끓고 그 여론이 법을 만들고 형량을 들썩거리게 한다. 그 결과 전자발찌 부착과 화학적 거세가 도입됐다. 화학적 거세 소급 적용에 대한 위헌 논란까지 제기될 만큼 성범죄 처벌 체계는 상당히 완비됐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국민들은 형량에 만족하고 있을까. 다시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건이 발생하면 또다시 형량 상향이 거론되지 않을까. 이렇게 형량 인플레이션 현상이 계속되면 우리 형법에는 최고형인 사형만 남을지도 모른다. 강간을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게 되면 서너 명의 목숨을 빼앗은 연쇄 살인범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감정에 기초해 ‘이것 하나만 예외적으로…’란 생각으로 법의 정신을 넘어서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형량을 높인다고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처벌 강화로 성범죄가 줄었다는 통계는 어디에도 없다. 형량이 그토록 높은 미국도 성범죄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범률이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범 재범률은 45%에 이른다. 엄벌도 중요하지만 교정 프로그램 개발도 그에 못지않게 시급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또 현행법으로도 성범죄를 충분히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다. 강간과 결합된 살인죄의 경우 사형을 선고해 범죄 위축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오히려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이라는 이유로 법원에서 선고된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거듭 강조하지만 나는 여성, 그리고 법학자로서 성범죄자에 대해 엄정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엄벌만능주의가 매우 손쉬운 방법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부처 간 이권다툼으로 흩어져 있는 성범죄 관련 법령을 재정비하고 성범죄 예방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보다 실효성 있는 해법일 것이다.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의 피해자 오빠가 경찰시험에 합격한 뒤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너는 아무 죄 없는 내 동생을 죽였지만 나는 경찰이 돼서 너의 가족을 지키고 있다.” 이번 논란이 법치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류 여 해 한국사법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