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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그곳 - ‘지슬’ 동백동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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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첫 장면에서 마을 사내들이 꽉 끼어 피신할 궁리를 하던 좁은 구덩이(아래 사진)와 큰넓궤 입구 장면을 촬영한 동굴(위 사진)이 동백동산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제주도 서귀포시 중산간마을인 동광리의 한 동굴에 주민 120여 명이 숨어들었다. 해안선에서 5㎞ 밖에 있으면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토벌군이 소개령을 내린 때였다. 하지만 기르던 가축과 추곡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내일모레면 사태가 끝날 건데…’. 노인·아이 할 것 없이 삶은 감자를 나눠 먹으며 버틴 날이 보름을 넘기고 달포를 넘겼다.

그리고 죽음이 닥쳐왔다. 4·3사건 당시 일어난 실화다. 그 사건을 제주도 출신 오멸 감독이 영화로 빚어냈다. 올 초 세계적인 독립영화제인 미국의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흑백영화 ‘지슬’이다. 제주도 방언으로 지슬은 감자라는 뜻이다.

영화의 모델이자 주된 촬영지는 동광리 큰넓궤(동굴)이지만 큰넓궤는 현재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대신 큰 넓게 입구와 다수 장면을 촬영한 동백동산을 찾았다. 제주도에서 가장 울창한 곶자왈 중 하나인 동백동산은 4·3사건 당시 선흘리 주민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반못굴(도틀굴)·목시물굴·밴뱅디굴·대섭이굴 등 동굴로 몸을 피한 주민들은 결국 대부분 토벌군에 체포됐다.

곶자왈 곳곳에 흩어진 촬영지를 찾기 위해 ‘지슬’ 촬영지 투어(지슬 원정대)를 진행 중인 제주생태관광(storyjeju.com)의 도움을 얻었다. 선흘1리 마을 돌담길을 지나 동백동산 서쪽 입구로 들어섰다. 영화에서 마을 사내들이 엎드려 토벌대의 동세를 살피던 구덩이, 제주 토박이 상표(홍상표)가 토벌군을 따돌리던 흙길, 영화 첫 장면에서 여섯 사내가 피신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좁은 구덩이가 차례로 나왔다. 선흘리 주민들도 여기 어디에 몸을 숨겼겠지. 모가지째 툭 떨어진 붉디붉은 동백꽃이 괜스레 가슴 아팠다.

서늘한 숲길을 1시간여 걸어 남쪽 입구로 나섰다. 영화에서 큰넓궤로 나온 동굴은 반못(연못)을 조금 못 미친 사유지에 있었다. 영화에는 땅속을 한참 파고든 것처럼 묘사됐으나 실제로는 얕은 굴이었다. 나무뿌리를 헤치고 들어가자 내부는 의외로 넓고 아늑했다. 짙은 빛 흙바닥이 보드라웠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4·3의 무덤이지요.” 안내를 맡은 제주 토박이 고제량씨의 말이다. 사건 당시 30만 제주 인구 중 10분의 1이 희생됐다. 걸음마를 갓 뗀 아이가 총탄에 죽고(너븐숭이 애기무덤), 임산부가 발가벗겨져 대검에 찔려 죽고(비학동산), 다 끝난 줄만 알았던 1950년 양민들이 집단 총살당한 흔적(섯알오름)이 지금도 섬 곳곳에 널려 있다.

이제 곧 4·3 위령제가 열린다. ‘그날’ 이후 무려 예순다섯 번째 4월 3일이다. 그럼에도 4·3사건은 다만 사건일 뿐, 아직 어떻게도 규정되지 않았다. ‘당신과 나의 뜨거운 감자’. ‘지슬’의 카피가 문득 사무치게 떠오른다.

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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