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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소재 실험극 세계 무대 '노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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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극단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배울 수도 있겠죠. 청소도 하고 때론 전단도 붙이고 선배들 연기하는 것 눈동냥도 하고, 그러다 보면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기고…. 그러기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극단을 만들었다. 아니, 극단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그냥 뜻있는 젊은이끼리 모인 집단 정도로 해두자. 이들은 언어를 가능한 한 배제하거나 줄거리 없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등 실험극에 몰두했다. 지하 연습실에 갇혀 있던 이들의 작품이 화려하게 데뷔한다. 1·2월엔 국립극장 무대에, 그 이후엔 연말까지 영국·일본 등의 소극장 무대에 활발히 진출한다.

지하 연습실에 갇혀 있던 이들의 작품이 화려하게 데뷔한다. 1.2월엔 국립극장 무대에, 그 이후엔 연말까지 영국.일본 등의 소극장 무대에 진출한다.

'아트 3 씨어터''춤추는 난쟁이''뛰다' 세 팀이 바로 그 주인공. 이들은 올해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한국 연극을 세계에 알릴 '컬처로드 2003' 프로젝트에 선정됐다. 국립극장과 서울프린지네트워크가 지난해 시작한 '컬처로드' 프로젝트는 젊고 유망한 예술가를 발굴해 이들의 작품을 국내외에 소개하는 작업이다.

이들 작품은 형식은 비언어적이지만 내용은 전통에 바탕을 뒀다. 세계 무대를 겨냥해 텍스트(언어) 대신 몸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힘을 실었다.

'뛰다'팀이 무대에 올리는 '또채비 놀음놀이'는 네명의 또채비(도깨비)가 노는 모습을 기발하게 그려냈다. 연출을 맡은 배요섭(33)씨는 말한다. "옛날 얘기만큼 재밌는 소재가 없어요. 어딘가 매력이 있으니 수백.수천년간 이어져 왔겠죠. 그 얘기를 소재로 뭔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고 싶었어요." '뛰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97학번 동기생 몇명이 주축이 돼 2001년 결성했다.

'춤추는 난쟁이'팀은 '웅녀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각각 20분짜리 에피소드 세 개를 담았다. 그중 1인 마임극인 '노이로제'는 이들의 재기발랄함을 보여준다. 현실에 찌든 직장인이 집에 돌아와 뭔가를 먹기 시작한다. 과자를 먹던 그는 성이 차지 않는지 어항 속 물고기와 집안의 고양이, 심지어 관객의 머리까지 먹으려 든다.

'춤추는 난쟁이'는 서울예대 98학번 동기생들이 학창시절 만든 팀이다. 연출자 고창석(33)씨는 "지난 1년간 오직 트레이닝에만 주력했다. 불안하고 힘든 시기였지만 많은 도움이 됐다. 그후 10분짜리 극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가며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춘천에 근거지를 둔 '아트 3 씨어터'는 한 인간의 희로애락을 초현실적으로 다룬 '생'을 무대에 올린다.

"실험극이라 관객이 어려워하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단 1초의 쉼도 없이 날아오는 이들의 대답은 "절대 아니다"다.

"신체극.비언어극 등 어려운 단어로 연극을 이리저리 쪼갤 필요가 있나요. 그런 말들은 관객들과 연극을 더 멀리하게 할 뿐이에요. 어렵게 생각하고 분석하려 들면 연극은 더 어려워져요. 그냥 흐름을 보면서 몸으로 느끼면 돼요. 연극을 잘 모르는 어린이나 나이 많은 분들이 저희 연극을 더 잘 이해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연극 하면 배고프다고 했던가. 이들은 편의점.무대 스태프, 심지어 방송국 방청객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죽을 필요는 없다. 올라갈 무대가 있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있고, 주체할 수 없이 아이디어가 넘쳐나니, 이들의 열정이 식지 않는 한 한국 연극의 미래는 밝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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