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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삭제소동 빚은 「루크」지…「맨치스터」의 저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재클린」여사는 남편과 애들과 같이 지내길 바랐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그녀와는 달리 그녀가 뚝 떨어진 곳에서 불의에 닥친 슬픔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5결심을 했으며 그녀는 떠났다. 별거생활은 비극을 잊는 편리한 방법이 되기로 했다. 그녀는 항상 길게 쓰는 버릇대로 그에게 10「페이지」에 달하는 긴 편지를 썼다. 그녀는 그 편지를 통해 남편과 같이 지내지 못한 대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밝히고 대서양의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남편이 자신의 슬픔을 같이 느껴주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놀랍게도 모든 일이 순조로웠으며 곳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희랍 선박왕 억만장사 「모나시스」의 호의로 지중해연안에서 「요트」 놀이로 몇 주일 지내는 동안 그녀는 완전히 기분이 전환됐으며 10월 17일 예상보다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귀국했다.
「패트릭」이 죽었을 때 「재클린」은 64년 1월 1일까지 휴양을 취할 것이라고 발표됐었다.
그러나 그녀의 산과의 「존·왈쉬」 박사가 그녀의 건강은 완전하다고 판단함으로써 그녀는 되도록 빨리 사교계에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대통령에게 『당신이 원하는 어느 곳에서나 당신과 같이 선거유세를 하겠다』고 말했다. 남편이 「존슨」 부통령과 같이 선거유세 여행을 하겠느냐고 묻자 대답 대신 그녀 약속 비망록을 탁 펴면서 11월 21일 22일 23일자에 「텍사스」라고 휘갈겨 썼다. 「케네디」 대통령은 기뻤으나 다소 불안했다. 그는 그녀가 그곳에 간 것을 그 뒤에 후회하지 않으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텍사스」에서 좋은 사람들을 사귀고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도록 이번 여행에 동행하기를 바랐다. 그는 결혼한 후 처음으로 그녀에게 「댈러스」에서 무슨 옷을 입겠느냐고 묻고 『「댈러스」오찬회에는 「밍크·코트」에 「다이아몬드」「팔찌」를 낀 부유한 공화당 부인들이 모두 모여들텐데 당신은 수수하게 차려입으시오. 그래서 정말 고상하고 좋은 취미가 어떨 것인가를 보여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방에 가서 「드레스」를 걸치고 나와 대통령 방을 들락거렸다.
『「댈러스」에서 선보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내가 「모터케이드」의 첫차에서 뽐내야만 되는 거지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케네디」는 대통령이란 자기 아내와 함께 군중 속에 뛰어들어야 하며 의젓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대통령은 군중들에게 보여져야 한다며, 도 군중 속에 뛰어 들어야 하며 천천히 행동해야 한다. 「케네디」대통령은 「텍사스」로 출발하루 전날 자기 부인 공보비서 「파멜라·더너」여사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퍼스트·레이디」의 머리형에 대해 상의했다.
「파멜라」비서는 대통령 무개차에 속이 들여다보이는 「플라스틱」덮개를 씌우도록 건의했다.
이 두 사람은 여자의 모자에 대해 한참 얘기했는데 대통령은 나중에 그 얘기를 농담으로 들어버렸다.
그는 『「워싱턴」시내에서 45분간 「오픈카」로 행진을 하라』고 지시했다. 출발날짜는 11월 20일 수요일이었다. 「로버트·케네디」 법무장관은 그의 형이 당시 10일 동아 우울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확실히 대통령은 19일 아침에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얘들은 그때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버지니아」주 「아토카」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프랑스」어 교습을 받지 못했다.
그는 「드골」과 효과적으로 대결 협상하려고 불어를 배웠는데 이 사실은 극비에 붙여지고 있었다.
「허시」여사는 63년 9일 이후 매일 아침 대통령 관저에서 대통령에게 불어 개인지도를 해왔다.
그는 불어를 잘 하는 자기 부인에게 『내가 불어를 완전히 구사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소』라고 묻자, 그녀는 『1년은 걸린다』고 대답했다. 그는 『6개월이면 자신이 있소. 내기하지』라고 말했으나 부인의 도전투인 그 말에 자신 있게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열을 올리던 불어 공부도 19일엔는 하지 않았다. <외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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