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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심는 나날을… 「퍼스트레이디」의 소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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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엷은「핑크」빛을 기조로 단아하게 꾸며진 접견실에 「퍼스트레이디」는 하얀 치마저고리로 기품 속에 서 있었다. 그 기품에 눌려 상냥하게 권함을 받으면서도 선뜻 의자에 앉아지지가 않는데 동행한 서 기자가 색채사진을 부탁드리고 싶으니 좀더 빛깔 있는 차림을 해주었으면 한다. 무례한 청이었건만 이분은 싫은 기색 없이 잠깐만 시간을 달라면서 방을 나갔다. 오복수남수단 치마에 옥색반회장저고리로 다시 나타날 때까지 불과 7분 남짓, 한쪽 벽에 기대 놓인 연분홍 겹 동백꽃에서 맞은 편에 있는 「카를레아」에 시선을 옮겨 꽃의 아름다움을 채 감상할 사이가 없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느꼈던 거리감이 가셔지고 포근한 친밀감에 싸여지는 것을 느꼈다. 형식적인 물음과 대답, 이런 것이 차라리 쑥스러울 정도로 이 우아한 부인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화제는 우선 어머니들끼리의 관심사가 앞섰다. -따님의 경기여중 입학을 축하합니다. 『그 아이 혼자만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너무 소란을 떠는 것이 싫어서 시험 날 그저 체하지 않도록 질게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주었을 뿐이에요. 다른 어머니들처럼 따라갈 수도 없고요.』
나는 새삼 국가원수부인을 의식한다. 어머니라면 누구나 기가 막히도록 염려되는 이 고비를 대통령부인이기 때문에 안으로만 접어 삼가야만 하는 마음, 일상조차도 어렵고 조심스럽다.

<자녀교육에 힘쓰고>
-그래도, 부인께선 자녀교육에 각별히 마음을 쓰신다고 들었는데요.
『그저 마음뿐이죠. 이를 갈 때 같은 때 조심을 해준다든지, 아침마다 앵무새가 된다든지, 날마다 그림일기를 읽는다든지-그런 정도예요.』
-앵무새라니요?
『오늘은 잘못이 없도록 하라는 똑같은 말이니까요.』하며 곱게 웃는다.
시장에 가서 부군과 아기들을 위하여 찬거리를 사는 재미를 가질 수 없는 「퍼스트레이디」는 오순도순 주부생활이 아쉽고 충분한 수면이 아쉽다. 청와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부군의 시중 때문에 시간을 쓸 필요는 없어졌지만 여섯 시간 자면 많이 쉬는 편이란다. 그러면서 여사는 열심히 신문을 읽고 또 공부를 한다. 사회와 격리된 생활속에서라도 국민들과 연대하기 위함이고 또 자신의 교양을 높이기 위하여서다.
『그분은 직접 정치를 하시니깐 보고를 받아 아시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아서 신문을 읽지 않으면 답답하고 남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도 없거든요. 조간은 오자마자 펼쳐보고 석간은 밤 시간에 읽어요.』
-공부를 많이 하신다는데 무엇을 하십니까.
『오전 10시에서 12시까지 교수님을 모셔와서 한국사 사회학 문화사의 강의를 듣기로 하고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을 때가 많아요.』
-부인께선 「양지회」 등 사회복지사업에 힘을 많이 쓰시고 계신데 여러 가지로 피로하시지요.

<여위고 주름살져>
『하는 일도 그리 없는 것 같은데 청와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여위고 주름이 늘었어요. 하지만 회원들이 잘 도와주시고 또 조금씩이라도 성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 같아 보람을 느껴요.』
그 여윈 몸매의 우아함은 한복의 아름다움을 남김 없이 발휘하기 위한 것 같다고 나는 속으로 뇐다. 주름이 늘었다는 말은 심리적인 것이고 엷은 화장의 얼굴은 소녀처럼 애잔하다.
-「양지회」일 때문에 지방에도 가끔 가신다지요. 『네. 나는 그분의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지요. 또 그분도 내가 하는 일에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지방의 부인들과 간담회 같은 것도 가지고 기탄 없는 의견을 듣기도합니다.』

<일하는 우리여성>
-부인께선 가끔 외국방문을 하시는데 외국여성과 우리여성을 비교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외국에 가끔 갔다해도 짧은 기간이며 도 공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뭐 말할 자격도 없지만 그곳 여성들이 사회복지활동에 힘을 쓰고있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여성들은 인내심이 강하여 여러 가지 장점도 있고, 또 일을 하는 사람은 손톱이 닳도록 많은 일을 하지만 시간을 그저 멍청히 낭비하는 여자들도 많은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여러 여성들과 간담회를 할 때도 나는 가내수공 같은 것을 장려하드록 말하고있어요. 시간의 유효 적절한 이용은 아이들에게 산 교육이 될 것이며 또 외화획득도 할 수 있을 것이에요. 또 시간이 남는 여성들이 탁아소나 병원 같은데서 짧은 시간이라도 일정한 때를 정하여 계속하여 봉사를 한다든지.』
-부인께선 트럭을 타시고 빈민굴에 무료급식도 가시고 적십자병원에서 가제 접기도 하시지요. 『시민들과 직접 호흡을 함께 하며 서로의 사정을 아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저 힘이 모자라 모든 사람들을 잘 도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요』

<취미는 「꽃꽂이」>
-꽃꽂이를 무척 잘하시며 또 좋아하신다는데 그렇게 하실 일이 많으시니 취미생활 하실 시간도 없으시겠어요.
『의장공관에 있을 때만 해도 서투르나마 내 자신이 했었는데 요즘은 이따금씩 밖에 못해요.』
-실내장식의 색조가 참 우아합니다. 직접 선택하신 것인가요.
『내가 정한 것이지만 직접 나다니지 못하니깐 그저 갖다 보여주는 견본에서 고를 수밖에 없어 범위가 국한되어 있어서요. 그런 일뿐 아니고 나는 참 무엇이든 자유가 없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자신이 부족한 것만 같고 조심스러워요. 모든 감정표시를 삼가고 내 자신을 노출시킬 수가 없지요.』

<호소장인 일기장>
딱한 심정을 말하면서도 여사의 얼굴에는 역시 잔잔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어찌 자신을 밀폐할 수만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에게는 일기가 필요하다. 가계부를 쓰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지만 일기 적기는 원수부인이 되고 나서란다. 모든 안타까움, 쓰라림, 그리고 기쁨과 보람된 일을 모조리 적어둔다 한다. 그래서 그의 일기는 호소장이라고 스스로 불린다.
-재미있는 내용이 많으실 것 같은데 하나쯤 공개하세요.
육 여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즐거운 듯이 얼굴을 펴고 『그럼 내가 정말 흐뭇했던 일 하나를 이야기하지요. 실은 얼마 전 광주에 갔다온 일이 있어요. 돌아와서 며칠 후에 어느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았어요. 그 사연이-.』
-말씀하시기 어려운가요.

<시찰 일엔 낯 붉혀>
『글쎄 내가 광주 갔을때 마중 나온 군중들 틈에 끼여있었대요. 그런데 그때까지는 나와 청와대에 대하여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서 옷 포켓에 두 손을 꽂고 버티고서 있었는데 내가 분명히 자기를 보고 손을 흔들더라는 거예요. 참 우스워요. 나는 그저 여러분께 인사를 했을 다름인데.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포켓에서 뺐답니다. 그리고(여사는 부끄러운 듯이 잠시 망설였다. 이윽고 사나이 가슴이 뭉클해지더라는 거예요. 나는 외롭지 않다-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국가의식에 눈이 떠졌다는 거예요. 그 편지를 받고 참 나는 기뻤어요.』

<군중엔 고루 미소>
-그 청년의 실감이겠지요.
이 일화는 나에게도 생각하는 바가 컸다. 그 청년은 여사가 모인 군중에게 고루 보인 미소와 손짓을 오직 자기를 위한 것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육 여사의 참뜻이 아니었던가. 국가원수의 부인으로서 그는 국민의 한사람 한사람에게 한결같이 살뜰한 정을 주려하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여성회관 더 필요>
여사의 따뜻한 환대에 시간가는 줄 모르던 우리는 「커튼」너머 겨울광선이 바뀌어진 것을 깨닫고 새삼 당황하였다. 서둘러 새해의 계획을 묻자 『여태까지 해오던 일을 더 성실히 발전시키고 싶어요. 가능하면 근로여성을 위한 여성회관을 몇 개 더 짓고요. 그리고 어린이들의 정서교육에 특히 힘을 써보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품위와 예절과 애국심을 키워주고 싶어요. 아마 머지않아 어린이 예법 책이 나올 것이고 「어깨동무」라는 어린이잡지도 그래서 시작한 셈이죠.
그리고 이 운동은 어떠한 벽촌에까지도 아동문고를 만들어 보급시킬 계획입니다.』
여사의 얼굴이 곱게 상기되어 있었다. 새로운 포부에선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오래 여사의 시간을 빼앗은 까닭인가. 우리는 마음을 남기며 일어섰다. 이 착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여사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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