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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28) 첫 번째 멘토 김보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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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8년 여름 전남에 심각한 가뭄이 닥쳤다. 김보현(왼쪽) 당시 전남도지사가 가뭄 극복 대책을 점검하러 현장을 방문했다. 함께 현장을 찾아 농기계를 살펴보는 육영수 여사(왼쪽 셋째)가 보인다. [고건 전 총리 제공]

보직 없이 보낸 공직 첫 3년 반. 힘들었지만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그때 멘토를 만났다. 김보현 전 농림부 장관이다. 1962년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내무부 지방국 행정과에 배정됐을 때 그가 행정과장이었다.

 내 자리는 계장 책상 옆에 인공위성처럼 붙어있었다. 보직이 없으니 계장 책상을 줄 수 없고, 명색이 사무관이니 계원 자리에 앉힐 수도 없어서다. 그때 기획계장이 초등학교 출신의 국세청장에 청백리로 이름을 알린 김수학씨였다. 일과가 끝나면 김보현 과장이 나에게 말했다.

 “맥주나 한 잔 마시러 가자.”

 서울 을지로 내무부 청사를 나섰다. 그는 나를 이끌고 옛날 중앙우체국 뒤 샛골목으로 향했다. 충무로와 명동으로 잇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책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여러 분야의 외국책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 거리였다. 나에겐 신천지였다. 구하기 어려운 책도 주인에게 주문하면 살 수 있었다. 김 과장은 필요한 책을 찾아보고 샀다. 주로 지방행정에 관한 서적을 봤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를 주도한 엘리트 집단은 두 부류였다. 군인 출신과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기술관료 또는 전문관료)였다. 김 과장은 이후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했다.

 나도 그를 따라 지방행정에 대한 책을 섭렵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자주 들렀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촌락』도 그 곳에서 탐독했다. 우리나라 농촌지역의 현황과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였다. 6·25 전쟁이 불과 10년 전 일이었다. 농촌현실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국내 서적은 거의 없었다. 그 책자는 나중에 새마을운동을 기획할 때 귀중한 참고자료가 됐다.

 그렇게 서점가를 한참 둘러본 다음 원래 목적지였던 맥주집으로 향했다. 명동과 무교동에는 직장인들이 일과를 마치고 들르는 맥주집이 많았다. 요즘의 호프집과 같은데 그때는 ‘삐어홀(beer hall)’이라고 불렀다. 정종이나 막걸리는 대포집, 맥주는 삐어홀에서 마셨다. 저녁이면 넓은 홀이 양복쟁이 직장인으로 꽉 찼다. 맥주잔과 땅콩·오징어 같은 마른 안주를 앞에 두고 토론을 했다. 행정이 주제였다.

 ‘모든 행정에는 사각지대가 있다’,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있다’. 그에게 배운 명제였다.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때마다 한번도 잊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이 정책을 현장에 적용하면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까 생각하는 버릇은 이때 자리잡았다. 일종의 상상 속 정책 영향평가였다.

 즐거운 추억도 많았다. 그때 삐어홀에서 맥주는 1000cc 잔에도 나왔다. 동료들과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술값을 걸고 둘이 서서 누가 빨리 마시나 내기를 했다. 덕분에 내가 술값을 낸 적은 없었다. 취기가 오르면 야당 국회의원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보직을 받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김 과장은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었다. 광주사범을 나와 교사를 하다가 서울대 법대를 다시 들어갔다. 고시에 합격해 행정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고도 행정과장 밑 계장 생활을 7년이나 했다. 과장인 그가 내 처지를 해결해 줄 순 없었지만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줬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공직생활의 첫 멘토였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김보현

김보현(1924~2006)=1944년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순천국민학교·광주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49년 서울대 법대에 다시 입학했고 51년 제2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 내무부 지방국 행정과장·지방국장을 거쳐 66년 전남도지사로 임명됐다. 이후 체신부·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동신화학 사장,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원장으로도 일했다. 68년 한해 극복에 기여한 공로로, 76년 수출의 날 기념으로 대통령 표창을 두 번 수상했고 90년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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