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의 해」여 「아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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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요사이 우리나라는 「레슬링」왕국에로 강행군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며칠 전 길가에서 두 어린이가 싸우는데 놀란 것은 「레슬링」의 반칙을 본따서 상대편의 눈을 훑는 것이있다. 외국 「레슬러」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반칙-입찢기·목조르기·손가락꺾기 등 골고루 동원되는 반칙형의 싸움을 보았다. 반칙은 관객에게 불쾌한 감을 줄뿐만 아니라 사회풍조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특히 「레슬링」의 반칙은 심만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감행해도 무방하고, 심지어는 발각되더라도 그 「카운트」가 끝나기 전까지 계속 감행할 수 있는 「공개적 범칙」의 소극적인 허용이 있는 것이 그 특색이라 할까. 그래서 어떤 외국선수는 「반칙선수」란 딱지가 붙어있기도 하다.
「요령있는 반칙」을 능숙하게 구사해도 승리할 수 있다는데 「반칙」「레슬링」이 지닌 반사회적 요인이 있음을 우리는 경시할 수가 없다.
자유사회의 기본은 「공정한 경쟁」이다. 될수록 동일한 조건과 기회 위에서 자유경쟁을 허용하는데 그 이상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슬쩍 반칙을 저지르더라도 돈을 버는 것이 장땡이요,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반칙을 하고, 설사 반칙을 해도 심간의 반칙선언을 힘으로 막기만 한다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만연해서는 안되겠다.
지난 한해를 회고해 볼 때 우리 정치 경제 사회생활에서 반칙이 적지 않은 해였던 것 같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말이다.
「레슬링」경기에서 보더라도 반칙은 「링」위에서 사례마다 「체크」하는 심판한 사람의 활동만으로는 근절되지 않는다. 문제는 「룰」그 자체가 엄하게 개정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선수와 관객의 마음 속에서 반칙이 추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선수릍 성원하는 나머지 상대편의 반칙을 반칙으로 갚아주면 마음 개운할 때가 있고, 심지어는 반칙을 구사해서라도 꼭 이겨줄 것을 바란다. 그러면서드 상대편의 반칙만은 유독 증오한다. 이 평범하고 당연한 인정 속에 깃들여있는 자가당착이 우리가 미워하는 반칙적 사회풍조의 연원이 아닐까. 「반칙의 해」여,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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