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윽한 기품 심수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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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 교수의 '스타로지'가 '스타의 향기'로 새롭게 단장됩니다.

실루엣처럼, 과거의 스포트라이트를 뒤로 한 채 살아가는 왕년의 스타들. 그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시절의 애환을 함께 짚습니다. 궁금한 근황도 알아봅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란 담배를 끊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접 만나거나 소문으로 부딪친 사람들을 멋대로 분류하는 것은 어떤가. 상대방이 속하고 싶지 않은 '과(科) '에 느닷없이 편입돼 있음을 확인하고 어이없어 해도 웬만해선 정정하려 들지 않는다.

가수 심수봉은 무엇으로 분류되는가. 대중음악계에서 그녀는 고향과 주거지, 실제의 삶과 이미지가 사뭇 다른 대표적 가수이다.

그녀는 제 2회 대학가요제 출신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1978년은 아주 특별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대단한 물건(?) 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노사연.배철수.임백천, 그리고 '문제의 가수' 심수봉 등이다.

데뷔 때부터 그녀는 좀 달랐다. 촌색시 같은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제법 클래식한 노래가 연주되려나 했던 대중의 소박한 기대는 졸지에 배신당하고 만다. 그녀는 '청승맞은' 창법으로 매우 '축축한' 트로트 가요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가 부른 '그 때 그 사람'은 국민가요 수준으로 대중의 귀와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한동안 우리에겐 그녀의 뒷모습만 응시하도록 강요된 추억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를 다시 분류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녀는 생활과는 유리되게 "사랑의 노래를 붙잡고 남자의 눈물이 미워요"(심수봉 작사.작곡 '미워요') 를 안타까워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남편의 퇴근 시간 전에 서둘러 장을 보고 맛있는 식탁을 준비하는 게 큰 기쁨인 전형적인 한국 주부다. 노래는 그녀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대중예술가인 그녀의 삶을 긴장감 있게 만드는 아름다운 촉매일 뿐.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작곡가다.

그녀는 불멸의 히트곡을 직접 작사하고 작곡한 싱어송 라이터다. 데뷔곡 '그 때 그 사람'을 비롯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미워요'에서 최근 '사랑했던 사람아'에 이르기까지 주옥 같은 노래들을 직접 만들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즈'를 본 사람들은 그 마지막 장면을 기억의 창고에서 쉽게 걷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변두리 3류 인생들의 무대에서 부르는 여주인공의 노래가 바로 심수봉 작사.작곡의 '사랑밖엔 난 몰라'였다.

음색은 가수의 컬러이며 창법은 가수가 사는 법이다. 가창자로서 그녀의 곡 해석은 유별나다. 간드러진다고 단언하기엔 그윽한 기품이 있다. 노래의 고개를 넘을 적마다 유연한 발걸음이 고혹적 자태를 풍긴다. 이번에 낸 음반에 실린 리메이크곡들도 원곡의 가수가 누구이건 간에 이른바 '심수봉표' 노래로 거듭났다.

심수봉은 동시대를 산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그 때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와 눈을 부딪치며 단 몇 분이라도 대화를 나눈 사람이라면 그녀를 자신의 고정 분류항에서 당장 끄집어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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