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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아시아 중시 정책을 완성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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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의 집권 2기 아시아 중시 정책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전략적 성공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TPP는 미국과 호주·브루나이·캐나다·칠레·말레이시아·멕시코·뉴질랜드·페루·싱가포르·베트남 등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자유무역체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이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 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지난해 12월 3일부터 12일까지 호주의 오클랜드에서 열린 협상에선 지적재산권·국영기업·환경·투자를 비롯한 복잡한 이슈와 함께 상품·서비스·농업의 시장 접근에 대한 미세 조정 등을 다뤘다. 교역에 대한 기술적 장벽과 통신·관세, 그리고 위생·검역 기준 등 기술적 문제의 해결에도 초점을 맞췄다.

다음 협상은 싱가포르에서 4일 개막해 13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협상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협정문 마련과 시장 접근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해 말까지 협상을 마치고 내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릴 정상회담에서 이를 발표하는 것이 목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같은 주요 국가가 TPP에 참여해 협상에 상당한 전기를 마련해 주기를 바란다. 지난 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은 일본의 합류를 위한 첫걸음으로 보인다.

 미국이 TPP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 교역증진권한(TPA)의 부활이다. TPA는 미 정부 시스템의 독특한 산물이다. 미 헌법 9장 1조에 따라 미 의회는 “외국과의 교역을 규제”할 권한이 있으며 “세금·관세·수입부과금·소비세를 부과·징수”할 수 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교역에 관한 권한이 없으나 그럼에도 외국과 조약을 협상할 권한은 있다.

 1974년의 교역법에 따라 미 의회는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교역 협정을 다룰 권한을 부여했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통칭 ‘신속처리권한’으로 불리는 권한을 부여해 미국의 교역 상대국이 불공정 무역을 한다든지 비관세 장벽을 만드는 문제를 협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의회는 이 신속처리권한(2002년부터 TPA로 불렸다)을 주기적으로 재인증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대통령은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의회는 백악관에 교역 문제에 관해 정기적으로 자문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대신 의회는 대통령이 맺은 교역 협정에 대해 90일 이내에 수정 없이 가부를 투표에 부치도록 했다.

이러한 TPA는 협상장에서 교역 협정과 관련한 미 정부 기관의 신뢰도를 높여줬다. 이는 백악관에 힘을 실어줬다. 협상 상대국에 협상 내용이 나중에 변경될 염려가 없음을 확신시키게 된다. 이에 따라 미 대통령들은 이 권한을 활용해 1979년의 도쿄라운드 협상, 85년의 미·이스라엘 FTA, 88년의 미·캐나다 FTA, 93년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94년의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등 수많은 무역 관련 협정을 처리할 수 있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칠레(2003)·싱가포르(2003)·호주(2004)·바레인(2004)·모로코(2004)·도미니카공화국(2005)·오만(2006)·페루(2006)·콜롬비아(2006)·파나마(2006), 그리고 한국(2007) 등과 FTA를 체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왜 의회에 이 권한을 요청하지 않았는가. 과거 TPA 갱신은 다분히 당파를 넘어선 이슈였다. 하지만 빌 클린턴 행정부부터 정쟁 대상이 됐다. 클린턴은 94년 TPA 갱신에 실패했다. 노동 조건과 환경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대통령이 노동과 환경 규제 조항을 교역협상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기를 원했지만 공화당은 그렇지 않았다. 그 결과 그 뒤로 8년간 백악관은 TPA 없이 지내야 했다. 신속처리권한은 2002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와서야 갱신됐다.

TPA로 날개를 단 부시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자유무역 어젠다를 추구했으며 5년간 17개국과 협정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라크전 등을 둘러싸고 의회와 백악관이 치열한 대결을 벌이면서 의회는 TPA 연장에 실패했고, 이는 2007년 7월1일 자정에 종료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TPA 갱신을 압박할 좋은 위치에 있다. 재선 승리 직후인 데다 자신이 제창한 국가 수출 이니셔티브(2010년 연두교서에서 밝혔던 것으로 2014년 말까지 수출을 두 배로 늘리고 미국 내에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내용)에 따르면 교역 어젠다를 활용해 수출 목표를 달성하고 미국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의회도 백악관도 움직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이렇게 지연되는 이유는 민주당·공화당·백악관의 교역 협상에 대한 우선순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TPA를 농업 분야 협상과 관련한 대통령의 권한에 주목한다. 민주당은 TPA에서 노동과 환경 분야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TPA를 갱신해 신속한 교역협정 비준이 가능해지면 중국의 관심도 부를 수 있다(한국과 일본이 동참한다면 더더욱 유리해진다). 한·미 FTA가 체결된 지 3~4년이 지나서야 미 의회를 통과했다는 사실도 TPA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에 남길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아시아 중시 정책의 선언이 아니라 한·미FTA와 TPP를 통해 진짜 자유무역 체제를 이루는 것이다. 미국은 TPA 없이는 이를 이룰 수 없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