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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이씨조선 중엽-말엽 인물중심(유홍렬)-교회재건의 중추(정하상)(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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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배경의 교세는 여전히 활발하지 못하여 그다음해에 또 찾아간 하상에게 성직자영입운동을 일시 중단하도록 종용하였고, 그는 이를 좇아 가족을 서울의 후동(지금의 산림동)으로 옮긴후 각지의 교우들과 연락하면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실천하였다. 그의 인격과 학식은 항상 교우들의 주목을 끌어서 실질상 그들의 지도자이며 목자의 구실을 다하였다.

<외방전교회 구제>
한편 1825년에 정하상등이 보낸 서한은 1827년에는 교황청에 전달되고 특히 때의 추기경「카펠랄리」(Cardinal Copelali)는 크게 감동되어 곧 불란서 「파리」의 「외방전교회」에 조선교회의 구제를 지시하였다.
이어 「카펠랄리」추기경은 1830년에 교황(Gregory 16세)으로 뽑히게 되자 조선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시켜 돌립된 교구로 창설하는한편, 당시 「샴」지방에서 포교중이던 「브른기애르」(Prwguiere소) 부 주교를 조선교구의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교회창설 이후46년만에 이루어진 이 조선교구의 독입이야말로 때에 청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곤있던 조선을 하나의 독립국으로 인정한 정치·외교상의 선구적 정책이며 근대적인 견지에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 문호개방의 촉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교구의 독립은 당시 조선교구를 관장하고 있던 북경교회에서 불만히 여기는바 되어 조선에 대한 외국인신부의 입국을 방해하고 그러한 움직임으로 1833년말에 중국인 유방제신부가 먼저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재건에 큰공>
이같은 까닭으로 「브르기애르」소주교는 조선입국에 많은 방해를 받고 1835년10월 요동땅에서 병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말았다. 어떻든 정하상등은 유신부를 의주의 변문에서 맞아들이는데 성공함으로써 30여년만에 다시 목자를 갖는 기쁨을 맛보았으며, 이어 1835년말이후 2년동안에 걸쳐 조선지방의 전교를 자청한「모방」(Mawhant나) 신부와 「샤스탕」(Chastonw정) 신부, 그리고 제2대주교로 임명된「앵베르」(Imbert범)주교를 영입할 수 있었다. (유신부는 나신부의 입국후 귀국하였음) 이리하여 정하상은 그의 집을 신부들의 숙소와 교회로 제공하고, 모든 활동에 협조자로서 온갖 힘을 기울여 교회의 재건에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최초의 신학생>
입국한 성직자들은 낯선 타국의 전교에 있어서는 그 지방출신의 신부를 갖는 것이 가장 정실함을 깨닫고 1836년말에는 김대건이하 3인의 젊은 신도를 뽑아「마카오」로 보냈으며 1838년에는 늙은 학생을 가르쳐 짧은 시일안에 신부를 양성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때에 44세의 나이로 그의 누이 정혜(41세)와 더불어 독신을 지켜온 하상은 제일 먼저 그대상으로 뽑히어 다른 3명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신학생이 되고 미구에 신품을 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희망과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기해년의 교난>
교회의 세력이 차차 소생함에 따라 그 동안에도 대소의 박해가 없지 않았으나 1839년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기해박해라는 두번째의 대교난이 일어났다. 기해교난의 기인은 무엇보다도 당시정권을 잡기 시작한 풍양조씨(왕헌종의 외가) 일파가 아직도 세도를 누리고 있던 안동김씨 일파를 곤경에 몰아넣기 위한 책동의 하나이었다. 동년3월5일에 수십명의 교우를 잡아가두고 이어 오종작통법을 더욱 엄격히 하고 사신의 배경왕래시에 잡인의 혼입과 물품의 반입을 철저히 단속하도록하는 한편 많은 교우를 속속 구금하였다.
드디어 6월1일(양7월11일)에는 정하상이 그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체포되고, 7월에는「앵베르」주교이하의 성직자마저 피체되었다. 온몸을 주리트는등 모진 악형에도 그들은 끝내 신심을 지키었고 그리하여 8월14일에는 세명의 성직자가 한강가 새남터에서, 그 익일추석날에는 정하상등이 서소문밖에서 목을 잘리었고 그의 어머니(79세)와 누이도 뒤 따라 같은 운명을 감수하였다.

<교리연구에 헌신>
정하상은 위에서 본바와 같은 직접적인 활동뿐만아니라 교리연구에도 깊은 공을 쌍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곧「상재상서」를 지어 우의정 이지연에게 올림으로써 천주교의 옳음을 밝히었다. 이글은 중국와 고전을 이끌어 당당한 필치로써 쓴 훌륭한 논설인데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된 유일한 호교론이었다. 그러므로 도합 3,400자로 이루어진 이 상재상서는 1887년에 이르러 「홍콩」교구의 고야망주교에 의해 발행되어 중국입 전교상에도 크케 이바지하였다한다. <문박·대구대학장>
◇이글은 외부 논문이옵기에 원문(국·한문) 그대로 실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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