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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국민 "여 부패, 야 무능"

중앙일보

입력

폭력시위가 재발하고 임기 내각이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정국이 다시 급속도로 불안해지고 있다.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물러난 뒤 진정돼 가던 시민들의 불만이 대법원의 예금인출 제한 판결에 다시 끓어오른 것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정치인들은 내년 3월 초 대선을 앞두고 정쟁에만 골몰,정치 불신을 키우고 있다.

◇ 유혈시위 왜 또 일어났나=최근 한 시민이 만기가 된 정기예금 20만달러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달 초 정부는 은행예금 인출 한도를 1인당 한주에 2백50달러로 제한했었다. 이 소송에서 하급 법원이 원고측 손을 들어주자 대법원이 즉각 이를 무효화했다. 여기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예금인출 제한조치는 전임 대통령 시절인 이달 초 취해진 조치지만 지금도 유효한 상태다. 은행의 환전 업무도 달러를 페소로 바꾸는 것만 가능하고, 페소를 달러로 바꾸는 것은 여전히 금지돼 있다.

시민들은 특히 달러나 페소로 맡긴 예금을 1월 중순께 발행될 새 화폐인 '아르헨티노'로 찾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복안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페소와 달리 새 화폐는 달러와 교환되지 않아 언제 가치가 폭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시위는 대체로 중산층이 주도한 것이어서 약탈사태는 거의 없었다.

◇ 정치불신 극에 달해=시민들은 여당(페론당)은 부패하고, 야당(라디칼당)은 무능하다고 비판한다. 특히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카를로스 그로소가 새 정부에서 중책을 맡은 것에 대해 불만이 컸다. 결국 그는 이번 시위로 물러났다.

페론당은 대권주자들이 난립,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다.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대통령은 3개월짜리 임시 대통령에 머물지 않겠다는 욕심도 내비치고 있다. 내친 김에 전임 대통령의 남은 임기인 2003년 말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페론당 총재인 메넴 전 대통령도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메넴은 세번 연속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규정에 묶여 이번 대선에 출마할 수 없는 만큼 정치적 입지가 약한 사아가 대통령 자리에 남아 있는 게 차기 선거에서 유리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대권주자들은 물론 이런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편 페론당은 대선에서 쉽게 이기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해 큰 비난에 직면해 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아니라 한 정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가 나온 경우 정당별 득표를 합산하고 그 안에서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도록 한 것이다. 예컨대 야당 후보가 30%를 득표한 가운데 여당의 A후보가 20%, B후보가 15%,C후보가 10%를 득표하면 A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식이다.

◇ 외국기업과도 마찰=정부가 과거 국영기업을 해외에 매각하면서 허용한 불리한 조항을 지금와서 수정하려 하자 외국 기업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전화.전기.가스.수도 등 주요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면서 새 주인(대부분 외국기업)에게 페소가 아닌 달러로 요금을 거둘 수 있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1달러=1페소' 환율정책(페그제)에 따라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페소화 가치가 떨어지면(평가절하) 그만큼 공과금이 인상돼 서민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로돌포 프리헤리 재무장관은 "공공요금을 달러화로 거둘 수 있도록 허용한 계약을 믿을 수 없다.

계약 당사자인 정부와 외국기업간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공과금을 달러가 아닌 페소나 새 화폐인 아르헨티노로 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언급이다.

정부의 이런 방침이 알려지자 텔레포니카(전화).엔데사(전기) 등 스페인 기업들이 들고 일어났다. 외국기업인들은 "아르헨티나 정부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특히 달러와 교환이 안되는 아르헨티노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채무상환 중단을 선언한 아르헨티나 임시 정부가 과거 정권이 한 약속을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정완 순회특파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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