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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히스토리] 마이애미 히트 (6)

중앙일보

입력

◇ 한 시즌만의 플레이오프에 진출, 그러나 여전히 넘지 못한 1라운드의 벽

93~94시즌을 앞두고 히트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전의 트레이드를 통해 1993년 1라운드 신인 지명권을 다른 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2라운드 지명권만을 행사했는데 35순위로 애리조나대학 출신의 센터 에드 스톡스를 지명했다. 하지만 스톡스는 정규시즌 경기에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93~94시즌 팀의 중심은 단연 글렌 라이스와 부상에서 돌아온 스티브 스미스였다.

라이스가 주로 2, 3번 포지션을 맡아 경기에 나왔고 스미스는 1, 2번 포지션에 번갈아 가며 출전, 두 선수를 위주로 만만치 않은 전력 구축에 성공했다.

라이스는 81경기에 나와 평균 21.1득점을 스미스 역시 78경기에 나와 17.3득점을 기록 팀의 원 투 펀치로 자리를 잡았다. 뒤를 이어 로니 사이컬리와 그랜트 롱이 센터와 파워포워드 포지션을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셔먼 더글라스가 떠난 이후의 포인트가드 포지션과 슈팅가드,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의 교통 정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정규시즌 성적 42승 40패를 기록하며 간신히 동부 컨퍼런스 8위 자리에 올라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한 히트의 1라운드 상대는 애틀란타 호크스였다.

당시 마이클 조던의 은퇴로 모든 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시카고 불스는 다소 주춤한 상태였고 그 빈틈을 노려 호크스가 동부 컨퍼런스에서 1위 자리에 올라 히트를 맞게 된 것이었다.

호크스 역시 주전 포워드 도미니크 윌킨스를 LA 클리퍼스로 보내고 대니 매닝이 합류한 상태라 히트로선 1992년 플레이오프에서 불스와 만났을 때보다는 나은 성적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직 히트가 가야할 길은 멀었다.

최종 5차 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시리즈 전적에 뒤져 아쉽게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마감하게 되었다. 당시 히트는 호크스의 포인트가드인 무키 블레이락에게 거의 농락 당하다 시피 했다. 따라서 팀은 포인트가드 보강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 94~95시즌, 변화의 전주곡

1994년 신인 드래프트. 팀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능력있는 포인트가드를 구하고 있었고 결국 1라운드 12순위로 애리조나대학 출신의 포인트가드 칼리드 리브스를 지명한다.

2라운드 지명에서도 오클라호마대학의 포워드 제프 웹스터를 데려와 괜찮은 신인 지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팀의 변화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94~95시즌 개막을 앞두고 히트는 주전 센터로 팀이 NBA에 들어왔을 때부터 활약하던 프랜차이즈 스타 로니 사이컬리를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로 트레이드 했다. 대신 시러큐스대학 출신의 다재 다능한 포워드 빌리 오웬스를 데려오게 된다.

그리고 라이스에 이어 팀 내 두 번째 스코어러였던 스티브 스미스와 그랜트 롱을 애틀란타 호크스로 보내고 케빈 윌리스를 데려와 사이컬리의 자리를 맡게 한다.

하지만 사이컬리, 스미스, 롱의 공백은 예상외로 컸다.

새로 합류한 윌리스, 오웬스는 제 몫을 보였고 라이스의 득점 력도 여전했다. 그러나 히트는 좀처럼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결국 오프시즌과 정규시즌 초반 선수 이동에 이어 감독인 케빈 로커리까지 교체되는 일이 발생했다.

로커리는 94~95시즌 중반 17승 29패로 기대이하의 성적을 남기며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뒤이어 어시스턴트 코치인 앨빈 젠트리(현 LA 클리퍼스의 감독)가 대행 자리에 올라 시즌을 마무리했다.

젠트리는 15승 21패로 시즌을 끝마쳤고 히트는 정규시즌 성적 32승 50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80년대 후반 NBA에 뛰어든 4개의 신생팀들 중에서 가장 먼저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성과를 보여준 히트였지만 샬럿 호니츠가 알론조 모닝과 래리 존슨, 올랜도 매직이 섀킬 오닐과 앤퍼니 하더웨이를 앞세워 선전하는 모습에 비교해 볼 때 오히려 뒷걸음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히트는 확실하고 충격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7)편에 계속

류한준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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