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고건 총리 내정이 뜻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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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고건 전 총리를 총리로 내정한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다. 盧당선자가 제시한 '개혁(대통령)과 안정(총리)'의 조화를 통한 국정 운영 기조와 어울린다.

그동안 盧당선자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정권 출범의 부담으로 등장해 있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내놓은 정책이 파격과 실험 쪽으로 흐르면서 여론에 불안감을 심었다. 개혁의 일방적인 추진을 허용하지 않는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은 여전하다.

'고건 카드'는 그런 불안정의 이미지를 씻고, 불리한 집권 기반을 극복하기 위한 포석일 것이다. '노무현식 개혁'의 출발은 전광석화(電光石火)의 밀어붙이기가 아닌 국민과 함께 하는 점진적 개혁이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무엇보다 개혁의 독주가 아닌 국민 통합 쪽에 비중을 두겠다는 의지로 평가할 만하다. 盧당선자가 한나라당에 찾아가 내정 사실을 통보, 협조를 요청키로 한 것은 여야 협력의 새로운 시도다.

高내정자는 박정희 정권부터 DJ 정권까지 총리.서울시장.장관.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런만큼 격동의 한국정치를 헤쳐온 그의 처세술을 놓고 비판과 구설도 만만치 않다.

정책 신념이 떨어진다는 비판에다 논란 많은 정책결정은 위원회를 만들어 책임을 미룬 채 이미지 관리에만 치중한다는 지적도 퍼져 있다.

盧당선자 지지자를 포함해 다수 국민도 그런 측면에서 불만과 걱정을 표시하고 있다. 高내정자가 맡을 '안정'이 욕을 먹고도 추진해야 할 국정 현안을 회피하는 쪽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 문화를 고치기 위해 高내정자가 의전총리가 아닌 '소신 총리'로 나설 수 있을지도 다수 국민은 의문을 갖고 있다.

당장 대미 관계 정상화가 새 정부의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盧당선자나 총리내정자 모두가 외교분야와는 거리가 멀다. 경제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분야에 최고의 인물들을 고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양새가 아니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팀을 짜는 과제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