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당선자 고건 총리 내정까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무현(盧武鉉)대통령당선자가 새 정부 초대 총리에 고건(高建)씨를 사실상 내정한 것은 盧당선자가 줄곧 밝혀왔던 '개혁 대통령-안정 총리'의 국정 운영 구도를 가시화하려는 포석이다.

盧당선자는 지난 18일 KBS-TV 토론에서 '몽돌(둥근 돌.대통령)과 나무받침대(총리)' 관계를 언급하면서 "안정 총리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전직 총리 재기용에 대한 일부의 지적에 대해선 "똑같은 물건이라도 짝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盧당선자는 일종의 승부사 기질을 가진 정치인이다. 스스로도 청와대에서는 지방 분권,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 등의 굵직굵직한 대형 과제만을 착수하겠다고 공언했었다. 반면 高전총리는 '행정의 달인'이라 불릴 정도의 노련한 행정 경험과 경력을 가졌다.

1961년 고시 행정과 합격 이후 30여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교통부.농수산부.내무부 장관과 관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거쳐 민선 서울시장을 역임했다. 때문에 盧당선자는 안심하고 행정을 맡길 수 있는 살림꾼을 택한 것이다.

盧당선자와 고건 내정자의 관계는 98년 국민회의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장 후보를 내심 노리던 盧당선자와 한광옥(韓光玉)현 최고위원은 DJ가 대중 지지도가 높았던 고건씨를 영입하는 바람에 양보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盧당선자가 고건 내정자를 만나 저녁을 함께 하면서 흔쾌히 양보해 고건 내정자가 탄복해 했다고 한다. 2년 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盧당선자는 가끔 국무회의에 참석하던 고건 서울시장을 눈여겨 보면서 "뛰어난 행정가"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盧당선자 주변 인사들은 전한다.

지난해 대선 직전 盧당선자는 김원기(金元基)고문을 보내 고건 내정자에게 "새 정부 총리를 맡아달라"며 지지를 제의했으나 高씨는 "내가 총리를 지낸 사람이니 나서서 돕기는 곤란하다. 물밑에서 도와주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후 행정수도가 대선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盧당선자가 수세에 몰렸을 때 高씨는 서울시립대 교수들을 보내 盧당선자에게 정책 자문 등의 도움을 주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이번 총리 내정 과정에서 盧당선자는 마지막까지 오명(吳明)아주대 총장.진념(陳稔)전 경제부총리 등을 놓고 검토했다. 민주당 쪽에서는 "의원 입각을 위해서는 김원기 고문이 총리로 가야 한다"며 거세게 압박을 가해왔었다. 때문에 당선자 주변 인사들이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20일 일제히 언론에 흘린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최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