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경제교육] 홍승녀 P&E 컨설팅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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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팔남매 중 여섯째인 나는 바로 위로 네 살 많은 쌍둥이 오빠가 있다. 어릴 때 으레 따라다니며 놀다 보니 딱지먹기나 구슬치기.자치기.깡통밟기 등 남자애들이 하는 놀이를 하며 자랐다. 친구들에게 '우리 오빠 중 누구 줄까?'하며 흔한(4명)오빠 한둘쯤 선심을 쓰던 기억도 난다.

오빠들 틈에 끼여 자란 나는 자상하면서도 엄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아버지는 약주를 하셔도 주사(酒邪)는 물론 흐트러짐 조차 없을 정도로 정신력이 강한 분이셨다. 집안끼리 정한 배필을 피해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결국 아버님은 나름대로 성공해 귀국했고, 어머니와 중매로 결혼했는데 금실이 좋았다.

아버지는 40년 전 이른바 '부동산 재테크'를 하신 것 같다. 가끔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집들을 싼값에 산 뒤 손수 여기저기 수선해 팔고, 또 다른 헌집들을 사곤 했다.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며 검소하게 생활했다. 더러는 형편이 어려운 낯 모르는 사람들을 불쑥 집으로 데려와 더운 밥을 대접해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자식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처럼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천안에서 서울로 전학왔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로 보내진 나는 늘 애물단지였다. 당시 아버님이 종종 하신 말씀 가운데 평생 가슴에 남는 가르침이 있다.

"승녀야, 사람은 항상 자기 분수를 지키고 돈 쓰는 요령을 알아야 한단다. 돈이란 먼저 쓸 돈이 있고 나중 쓸 돈이 있거든. 이 다음에 커서도 아버지가 한 이 말을 잊지 말거라. 사람은 이것을 잘(실천)하면 성공하고 잘못하면 망한단다."

그 말씀의 참뜻은 모른 채 나는 학교를 졸업한 뒤 결혼하고, 캘리포니아은행과 뉴욕은행 등을 거쳐 어느 새 사회생활이 27년째로 접어들었다. 또 회사를 설립해 8년째 운영하고 있다.

회사가 점점 커지고 직원수가 늘고 자금관리 규모가 커질수록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 말씀이 귀하게 와닿는다. 기업을 경영하는 지혜를 미리 예견해 일러주신 그 분의 사랑이 새삼 절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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