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억 달러 빚낸 델의 도박 … 시장은 일단 박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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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델컴퓨터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마이클 델이 2009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기자들의 질문을 경청하고 있다. [베이징=블룸버그]

세계 3위 개인용컴퓨터(PC) 제조업체 델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 마이클 델(47)이 일생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 1984년 텍사스대 기숙사에서 자신의 손으로 창업해 상장시킨 델의 주식을 전량 되사들여 상장 폐지키로 한 것이다. 그가 이끄는 사모펀드가 델을 244억 달러(26조6000억원)에 공개매수하는 딜이 성사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미국 언론이 5일(현지시간) 전했다. 일반주주로부터 인수할 델 주당 가격은 13.65달러로 발표 이전 주가보다 25% 프리미엄을 얹은 액수다.

 인수대금 중 150억 달러는 델의 회사 자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마련한 뒤 나중에 갚는 차입매수(LBO) 방식이다. 나머지 대금 중 7억 달러는 델 개인이, 사모펀드 실버레이크가 10억 달러, 마이크로소프트(MS)도 20억 달러를 대기로 했다. 사모펀드에 의한 기업 인수로는 2007년 블랙스톤이 260억 달러에 힐튼호텔을 사들인 이후 최대 규모다. 이번 공개매수는 과반수 이상 주주가 이에 응해야 성사되는데 현재 델의 우호지분이 42%에 달해 이변이 없는 한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까지 델은 PC의 대명사로 통하며 세계시장을 평정했다. 그러나 휼렛패커드와 중국 레노보가 델의 사업모델을 베끼기 시작하면서 입지가 흔들렸다. 2007년 16.6%였던 델의 PC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0.7%까지 곤두박질하며 세계 3위로 주저앉았다. 여기다 애플이 일으킨 ‘모바일 혁명’으로 태블릿PC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PC 전성시대’도 저물었다. 델이 위기에 빠지자 3년 동안 회사를 떠났던 그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2007년 CEO로 복귀했다.

 중국업체의 저가 공세에 맞설 것인가, 고급 제품으로 방향을 틀어 애플과 싸울 것인가의 기로에서 그는 새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늘어나는 기업의 데이터처리 용량에 착안해 IBM처럼 기업용 서버와 서비스제공 업체로 변신을 시도 중이다. 이를 위해 5년간 20여 개 정보통신(IT) 서비스업체도 인수했다. 그러나 상장회사라는 제약이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과감한 투자가 필요할 때도 주주 눈치 보기에 급급한 이사회는 미적거렸다.

 델이 회사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150억 달러 빚을 지우면서까지 상장폐지란 모험을 택한 건 이 때문이다. 델은 지난해 가을 이사회에 재인수를 정식 제안했다. 델의 최고재무책임자(CFO) 브라이언 글래든은 “상장폐지 후 델은 PC사업 비중을 더 줄이는 대신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서버 및 서비스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MS가 델의 도박에 판돈을 대기로 한 건 애플과 구글에 맞서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시장은 일단 델의 도박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미 ‘레드오션’으로 변한 PC시장에 안주해선 승산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기업 서버 시장 역시 중국업체의 도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MS 역시 델이 기대기엔 이미 기울어가는 해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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