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고려인 한맑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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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는 한 고려인 지도자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름은 한맑스(76). 그는 냉전과 6.25, 한국의 북방정책, 소련의 해체를 겪으면서 남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재외동포 학자였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그의 인생이 한반도 현대사와 연관돼 굴곡을 그리게 된 것은 북한에 김일성(金日成)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소련은 김일성에게 러시아어와 마르크스 이론, 당 강령 등을 숙지시키기 위해 일단의 전문가 집단을 파견하는데 이때 한맑스 교수도 평양에 간 것이다.

몇년의 평양생활 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한맑스 교수는 이후 '모스크바공산청년대학'교수를 지내면서 마르크스 이론 등을 강의했다. 이런 그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된 것은 88서울올림픽과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북방정책 추진이었다.

올림픽 때 서울의 발전상에 놀랐던 그는 북방정책의 영향으로 모스크바에 나타난 한국인들과의 자연스런 접촉을 통해 한국의 모스크바 진출에 남다른 도움을 주었다.

한국의 모스크바 진출은 고려인 사회엔 분열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했다. 초창기엔 남북한 대사들을 합동으로 초청하는 등 통합에 노력하던 고려인 사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친남한파.친북한파.중립파 등으로 갈렸고 그들 내에서도 여러개의 분파들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고려인 원로그룹은 "한반도의 분열도 원통한데 이곳에서도 동포들이 갈리면 안된다"며 봉합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후 분파를 아우를 수 있는 고려인 원로들이 한명 두명 병사하면서 고려인 사회 분열의 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한맑스 교수는 친남한파로 민주평통자문위원 등을 지냈지만 그렇다고 북한에 반대하는 쪽에 서지도 않았다.

그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모스크바 공동의장 등을 지내면서 고려인 및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벌였고 분열된 고려인 단체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유한(有限)한 운명의 인간으로서 그의 명복을 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려인 사회의 큰 별 '게오르기 김' 박사 등 고려인 원로세대들을 대체할 만한 후예들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은 그들을 떠나보내는 슬픔보다도 더 안타까운 일이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