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8)-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유홍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천하의 양서 읽어|주차·기기의 이>
박제가는 양반의 아들 가운데에서 온갖 천대를 받던 서자로 태어났다. 글을 좋아하고 학자를 아끼던 정조의 사랑을 받고 벼슬자리를 얻는 한편 네 번이나 북경에 다녀와 「북학의」라는 책을 지어 임금에게 올림으로써 외국과 통상의 길을 텄다. 그는 양반계급도 상업에 종사하게 할 것과 주차·기기의 이를 천하의 서에서 배울 것 등을 주장한 북학파학자의 거성이었다. 밀양에 본관을 둔 승지 박평(평)의 서자로서 1750년 11월5일에 서울에서 태어나 자를 재생 또는 차수 라하고 호를 초정 또는 정유(정유)라 일컬었는데 그는 11세 때에 아버지를 잃었다.

<누님에게 글 배워|19세에 시집발간>
이리하여 불우하고 도의로운 처지에 놓인 초정은 한편 타고난 재질이 뛰어난 어려서부터 그보다 네 살이나 많았던 누님에게 글을 배워 이미 15세 때에는 시·글씨·그림으로 이름을 날리고 19세 때에는 스스로의 시집을 엮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그는 이덕무(무)·유득공·이서구·서상수들과 더부어 이름난 북학론자 박지원(박지원)의 집에 날마다 모여 시를 짓고 이용후생의 실학을 토론하였는데 이덕무·유득공은 또한 서출이었다. 그런데 유득공의 숙부이던 유탄소·이서구 4인의 시 399수를 모아 「건연집(건연집)」이라고 이름을 짓고 1776년 11월 사신 따라 북경에 들어가게 됨에 즈음하여 이 시집을 서고전서 분교관반(반) 정균에게 보이고 그로 하여금 서와 제평을 짓게 함으로써 그들의 시명을 그곳에까지 떨치게 하였다.
여기서 그들을 시의 4가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때에 초정의 나이는 27세였다.

<29세에 첫 북경 행|제도문물 배우고>
이러할 무렵에 즈음하여 초정은 정조 2년(1778) 3월 29세 때에 연행(연행)정사 채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북경에 가게됨으로써 바라고 바라던 청국의 문물을 비로소 구경하게 되었다. 때마침 북경에서는 기전 등 3백60여명의 이름난 학자들이 사고전서를 편찬하고 있었으므로 초정 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던 한달 동안에 앞서 그들의 시집에 서문을 써준 반정균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와 사귀는 한편 그곳의 제도문물을 두루 살폈다.

<귀국 후 넉 달만에|북학의 내외 2편>
이 연행에서 그는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적기 시작하여 귀국한 후 석달만인 그해 9월에는 내외 2편으로 되어있는 「북학의」라는 책을 엮어내게 되었는데 내편에서는 북학의 서를 비롯하여 청국의 차, 선, 성, 벽. 와, 궁실, 도로, 교량, 목축, 시정, 상매, 여복, 약, 의, 궁실, 문방구 등 일상생활에 관한 모든 기구와 시설을 설명하고 우리도 가난을 면하고 잘살려면 이와 같은 청국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외쳤으며, 외편 에서는 전, 분(분), 유, 농잠(잠), 편론, 과거론, 관론, 재부론, 통강남절강상박의, 장론, 병론, 존주론, 북학변 등과 같은 정치·경제·국방의 개선시책을 논술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에 정조는 「규장각」이라는 왕실도서관을 창덕궁에 세우고 안팎으로부터 많은 책을 모으게 하는 한편 새로운 책을 편찬하여 발행케 하기 위하여 1779년에는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이수의 4인을 초대 검서관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 벼슬자리는 특히 서자들을 쓰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초정은 이후 14년동안 이 벼슬을 살면서 어제·어필과 일생록을 정리하고 규장전운·무예도보통지·국조병감·사기영선 등의 많은 책을 편찬 발간하는 한편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지식을 넓혔다. 그런데 정조가 1786년 정월 17일에 대신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국저에 관한 일을 말로나 글로 적어 올리도록 하라고 명하게 되니 초정은 그달 22일에 있었던 조삼시에 긴 글로써 이른바 「병오소회」를 올렸다.

<「병오소회」올려|식견을 인정받아>
이 글에서 그는 우리 나라도 청국과 같이 일본·유구·안남·서양의 나라와 통상의 길을 틈으로써 가난을 없이하고 주차·궁실·기집의 이를 천하의 도서에서 배우며 양반에게 상업을 권하여 놀고먹는 좀들(선비)을 없이할 것 등을 거리낌없이 주장하여 읽는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 대하여 정조는 『그대의 식취가 또한 볼만하다』는 칭찬의 말을 내려 그를 감싸주었다.
그러므로 초정은 1790년 5월 41세 때에 유득공과 더불어 진하사 황인점을 따라 두 번째로 북경에 들어가 건륭재의 팔순 성절을 진하 하는 한편 기전·옹방강·원원 들과 같이 이름난 학자와 사귀고 9월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정조는 맏아들(순조)을 얻게되고 이 즐거운 일을 청재에 알려 은언을 듣게되니 이를 감사하기 위하여 곧 초정을 다시 북경에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기사정(정삼품)이라는 이름만의 높은 벼슬을 받고 그해 10월에 종지사를 따라 세 번째로 북경에 갔다가 다음해 3월에 돌아와 더욱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검서로 버린 두 눈|안경 쓰고도 못 봐>
그러나 그의 주장은 청국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여겨 얕보고만 있던 썩은 선비들에게는 한낱 「당벽」이라는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초정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그는 10여년 동안의 검서관생활로 차차 눈이 어두워져 안경을 쓰고도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1792년에 그 벼슬을 그만두고 충청도 부여현감으로 옮아갔다가 2년후 45세 때에는 무과를 보아 장원으로 급제하여 오위장(종 2품)이 되고 다음해에는 경기도 여평 현령으로 나갔다.
이때에 즈음하여 정조가 1798년에 농서를 구하는 관음을 내리니 초정은 그가 앞서 지은 북학론의 내외편58조를 관음의 취지에 따라 27조로 줄이어 「진북학의소」와 함께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진소본 북학의」로서 여기서도 청국의 기술을 배우고 해외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며 놀고먹는 선비를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북경엔 네 번이나|순조 때에 귀양길>
그러나 이러한 초정의 북학론은 받아들여지지 못 한 채 정조는 1800년에 49세로 죽고 11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자리에 오르게 됨에 따라 천주교에 대한 첫 번째의 큰 박해가 1801년에 일어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정조를 미워하던 그 계조모 정순왕후가 일으켰는데 그해 2월에 초정은 주자서의 선본을 사오기 위하여 유득공과 함께 사은사를 따라 네 번째로 북경에 들어갔었다.
이 사이에 그의 벗이던 이강환 들이 목숨을 잃고 정고용 들이 귀양을 가게되었는데 북경으로부터 돌아온 초정도 억울하게 죄로 몰려 그해 9월에 함경도 종성부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3년반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1805년 3월에 풀리어 돌아왔으나 미구에 55세로 죽은 것 같다. 그의 저서로는 북학의 2권외에 시집 5권, 문집 4권이 남아있고 글씨·그림도 잘하여 청국의 진문술이 지은 서림신영에도 그의 이름이 올려있다. <필자=문박·서울대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