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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베토벤을 담아낸, 이 소박한 터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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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호 27면

지금은 몇 집이나 남아 있으려나. 전성기가 한참 지나 헐리기 전 재개발 구역같이 퇴락해 버린 청계천 헌책방가를 마지막 손님인 양 드나든 적이 있다. 책값이 싸다는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고 정체불명의 ‘명저’를 발굴하는 재미가 그곳에 있었다. 명저들은 대개 기이한 소문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나 번역자도 불분명하게 ‘편집부 구성’ 따위의 크레디트를 달고 나오는 그 1960~70년대산 해적 번역 출간물에는 가령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책략과 연출에 의한 것이라거나 베토벤의 신상에 대한 뒤숭숭한 입담이 흐른다.

[詩人의 음악 읽기] 빌헬름 켐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앵포르멜 회화처럼 강렬한 베토벤의 생애에서 우리를 크게 감동시키는 것이 그의 저항정신이다. 황제를 참칭한 나폴레옹에 대한 분노, 굴신의 처세에 능한 괴테에 대한 경멸은 특히 잘 알려져 있는 일화. ‘공작이여 당신은 대체 뭡니까. 우연히 공작으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공작은 몇 천 명이라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격렬한 편지글은 신분의 벽에 굴하지 않았던 거인 예술가의 면모로서 깊은 경외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청계천의 괴서는 다른 말을 한다. 베토벤이 귀족에 대해 거만한 행동을 한 것은 당시 세태 변화를 읽고 있는 귀족들이 반항적인 예술가를 재미있어 한다는 심리를 읽은 후의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유난히 추한 외모에 1m62㎝의 땅딸하고 우악스러운 몸집으로 아무데나 함부로 침을 뱉고 늘 불결하고 편벽되고 비굴하고 돈 문제에 집착하였으며, 고의적으로 신분이 높은 여성이나 기혼여성과 연애관계를 가졌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자, 이런 유쾌하지 않은 ‘전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숭배도 혐오도 과잉에서 비롯된다. 일면 고귀하고 일면 천박한 게 보통사람 일반의 면모일진대 한쪽 면만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대상의 크기에 압도된 데서 나오는 과잉반응일 수 있다. 도저히 보통사람일 수 없는 베토벤의 행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의 캐릭터를 전기적 사실에서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읽고자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실체적 진실에 가까이 닿는 길이라고 믿는다.

빌헬름 켐프(1895~1991)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 30번 음반. 1964년에 출반된 도이치그라모폰의 LP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베토벤의 성격과 성향이 가장 민감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그렇다. 나는 피아노 소나타 류를 작곡가의 직접적인 말이라고 이해한다. 피아노의 특성과 소나타의 형식은 여러 악기가 조합된 장르가 필연적으로 구사해야 하는 기술적인 요소를 최소화시킨다. 보다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심중의 말을 토해내는 것이다. 32곡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모두가 그의 꾸밈없는 중얼거림이자 독백처럼 들린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의 모든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을 공들여 연주한다. 빌헬름 박하우스나 에밀 길렐스처럼 사자후를 토해내는 사례도 있고 글렌 굴드나 프리드리히 굴다처럼 신묘하고 개성적인 피아니즘도 있다. 아예 요즘의 폴 루이스는 베토벤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야채수프 같은 ‘함머 클라비어’를 만들어 낸다. 모두가 연주가의 베토벤이 아니겠는가. 그 같은 해석의 문제는 연주행위의 본령이기도 해서 탈 잡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적 인물 베토벤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마저 지울 수는 없다. 그가 간절히 하고 싶었던 심중의 말을 왜곡 없이 듣고픈 열망은 베토벤의 크기를 의식할수록 더 커진다. 지금 나는 빌헬름 켐프의 베토벤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고 있다. 듣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떠올리고 있는 것. 과거의 한국인에게 켐프는 특별한 선생님이었다. 70년대 후반 라이선스 LP라는 것이 등장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개인 음악감상이 가능해졌을 때 성음-도이치그라마폰 딱지로 켐프 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그 시절 켐프의 베토벤 피아노는 교과서 읽기와 흡사했다. 평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런데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켐프가 그려낸 베토벤은 온화하고 따뜻하며 과장되지 않은 면모였다. 특히 연주가의 재주나 개성을 별로 의식하지 않게 만드는, 품격 있는 장인의 소박한 터치였다. 켐프가 해석한 베토벤일 수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누구보다 그 특별하면서도 측은한, 위대하지만 불행한 천재를 한 인간으로서 사랑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비창’ ‘열정’ ‘월광’ ‘발트슈타인’ 같은 유명 곡들을 듣노라면 96세의 생애를 살아간 노장 피아니스트의 가르침이 들린다. ‘부디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베토벤을 듣지 말거라’. 빌헬름 켐프는 관념적 우상으로서의 베토벤을 살아 있는 인격체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으로 치면 기본서 같은 것이 있다. 베토벤 피아노곡 입문으로 우선 켐프의 연주를 듣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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