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할 돈 모아 딸은 성형시키고, 아들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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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갈 길을 정확히 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40대에게 40은 더 이상 ‘불혹(不惑)’이 아니다. 승진과 출세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경주마도,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부모도 아니다.

자기 인생도 자녀 인생 못지않게 중요하다. 자녀에게 다 걸기엔 살아갈 날이 너무 많이 남아서다. 앞 세대가 걸어갔던 길과는 다른 ‘마이 웨이(My way)’를 걷겠다는 40대, 그리고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는 40대를 만나봤다.

# 금융회사에 다니는 이정길(47·가명·서울 잠원동) 부장. 그는 최근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 시작은 오리털 점퍼, 끝은 사교육비였다. “제 오리털 점퍼가 낡아서 한 벌 새로 사고 싶다고 했더니 ‘돈도 없는데 웬 옷 타령’이냐고 하더라고요. 한 달에 300만원 넘게 아이 학원·과외비로 쓰면서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아들은 방학을 맞아 학원 수업을 네 과목, 과외 수업을 네 과목 받는다. 맞벌이를 하지만 아이 사교육비 때문에 노후 대비용 저축은 한 달에 100만원도 하지 못한다. 주말이면 그는 ‘학원 셔틀’로 시간을 다 보낸다. 아이가 학원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대기했다 다음 학원에 데려다 주며 하루를 보낸다.

“제 삶은 없어요. 다 큰 애를 왜 데리러 다니냐고 하고 싶지만 싸우기 싫어 참습니다. 이렇게 키운다고 아이들이 부모 봉양이나 합니까. 이제 우리 노후 대비도 하고, 인생도 즐기며 살아야죠.” 그는 “강남에 나처럼 생각하는 아버지가 한둘이 아니다”며 “앞서 나가는 몇몇은 벌써 ‘애들 과외 줄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 방배동에 사는 대기업 회사원 박영한(44·가명)씨. 그는 초등학교 4, 6학년 딸 둘을 키우지만 한 달 학원비가 50만원도 들지 않는다. 두 아이 모두 지난해 중반에야 수학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조차 아이들이 먼저 졸라 등록시켜 줬다.

“학원·과외가 다 선행학습인데 그런 투자가 정말 필요한가 싶어요. 대신 음악이나 체육은 배우고 싶어 하면 가르치고, 영어는 집사람이 직접 봐주고 있습니다.”

그는 40대를 가리켜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부양받을 기대는 못하는 첫 세대”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의 행복이 사교육과 직결된다고 느끼지 못하고,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노후를 안정되게 보내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짐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외벌이면서도 그는 한 달에 150만원을 노후를 대비해 저축한다.

40대가 바뀌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아이를 둔 아저씨·아줌마 군단이 아니다. 자식도 소중하지만 자신의 건강과 외모, 취미도 그 못지않게 소중한 노무(NMU·No More Uncle)족이다.

자식 사교육에만 올인하기엔 100세 시대의 노후가 걱정스러운 하우스푸어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면 빚이라도 내며 달려들었던 선배 세대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의 변화가 사교육시장과 유통업계, 금융시장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 최근 30% 폐업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교육비 감소 추세다. 주로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40대는 국내 사교육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큰손. 가구주가 40대인 가정은 2009년 한때 소득의 13.6%를 교육에 쏟아부을 정도로 열성적이었지만 이후 조금씩 사교육비 비중을 줄여 지난해(3분기까지)엔 소득 대비 12.4%로 교육비 비중이 줄었다.

최근 서울 대치동 학원의 30%가 폐업할 정도로 사교육시장이 침체된 것도 이들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교육업체들이 갈수록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소비심리 감퇴, 최근 몇 년간 치솟은 물가로 인한 가처분소득 감소 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단지 경기불황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같은 기간 40대의 연금 불입액은 오히려 월평균 9만9669원(2009년)에서 13만5751원(지난해 3분기)으로 36.2% 늘었다. 소득 대비 연금 불입액 비중도 이 기간 2.6%에서 2.9%로 뛰었다. 같은 기간 가구주가 50대인 가정에선 연금 불입액이 10만4485원에서 13만5237원으로 29.4% 느는 데 그쳤다.

소득 대비 연금 불입액 비중은 2.8%에서 2.9%로 1%포인트 늘었을 뿐이다. 40대가 50대보다 더 노후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황원경 연구위원은 “올해 만으로 39~45세가 된 2차 베이비붐 세대는 1차 베이비붐 세대(만 50~58세)보다 금융 부채가 많고 기대 여명이 길어 노후에 대한 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며 “1차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노후 대비의 중요성을 비교적 일찍 깨달아 관련 저축을 늘리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과외시킬 돈으로 차라리 사업 밑천 대줘라”

갈수록 사교육에 대한 투자수익이 나오지 않는 현실도 40대의 갈등을 부추긴다. 사교육비를 쏟아부어 아이를 키워도 ‘88만원 세대’로 전락하기 쉬운 취업시장을 보며 과감한 투자를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LG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1월 ‘대학 교육 투자수익률 분석’ 보고서를 통해 “2011년 대학을 졸업한 이 중 대학 진학으로 인한 투자비용만큼 임금을 벌지 못하는 근로자가 67만 명, 일자리를 아예 찾지 못한 대졸자가 113만 명”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지선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대학 교육에 투자한 비용만큼의 수익을 거둘 수 없게 된 현상은 이미 10년 전 시작됐다”며 “대학 진학 비용뿐 아니라 사교육 비용을 합쳐 분석하면 투자 대비 수익률은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일부 40대 부모가 이런 현실을 자각하면서 최근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견기업 간부 박모(44)씨는 “사교육으로 명문대를 보내봤자 잘되면 대기업 회사원 아니냐. 의사·변호사 같은 전문직이 된다고 요즘 집안을 일으킬 정도로 떼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는 “가수 싸이나 개그맨 박명수 같은 친구들을 보며 ‘공부 잘해서 성공하는 시대는 갔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며 “친구들 사이에선 ‘과외시킬 돈 모아서 딸은 성형수술을 시키고 아들은 사업 밑천을 대주는 게 남는 장사’라는 우스개도 떠돈다”고 덧붙였다.

강한 자아와 개성을 드러냈던 X세대가 40대에 편입돼 ‘마이웨이 세대’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규정할 수 없다’ ‘기성세대의 질서를 거부한다’는 뜻에서 X세대로 불렸던 1965~76년생의 상당수가 이제 40대가 됐다. 『숨은 마흔 찾기』의 저자인 정덕현 평론가는 “지금의 40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문화를 반반씩 공유하는 하이브리드 세대”라며 “기존의 성공 신화나 정치·정책을 믿기보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자신에 대해 투자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녀 교육 외엔 승진과 재테크 정도가 주된 관심사였던 기존의 중년과 달리 지금의 40대는 ‘나의 취향, 나의 존재가치’ 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며 “최근 40대를 타깃으로 한 책들이 철학 등 인문학에 집중된 것도 이런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레저·의류·화장품 40대 고객 비중 껑충

개성과 감각을 중시했던 X세대는 부모가 되더라도 자신에 대한 투자를 줄이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선 지난달 고급 시계 구매고객 중 40대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어섰다. 예물 수요가 대부분인 고급 시계 시장에서 40대 남성이 또 다른 고객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성 현대백화점 홍보팀 차장은 “지난달 신촌점에선 전체 남성의류 매출이 0.4% 늘어나는 데 그쳤지만 40대 매출만 따져 보면 4.5%나 증가했다”며 “레저·의류·화장품 등의 분야에서 40대 고객의 비중은 빠르게 느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다”며 자신의 건강과 외모에 투자하는 노무(NMU)족이 유통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X세대가 40대에 접어든 7~8년 전부터다.

40대들이 자신과 노후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건강한 움직임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지나친 사교육비 지출은 ▶부모세대가 노후를 대비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가계 가처분소득을 줄여 내수 침체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양정호 교수는 “부를 증식시킬 기회가 많았던 50~60대와 달리 지금의 40대는 집 장만도 채 하지 못했거나 집이 있어도 빚에 짓눌려 있는 경우가 많다”며 “사교육비를 줄여 가계에 숨통을 터주고 노후 대비를 해야만 20년 뒤 안정된 노후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단시간에 전체적으로 확산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란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는 “설문조사를 해 보면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40대는 자녀에 대한 애착이 가장 크고, 자녀에 대한 투자를 중시하는 연배로 드러난다”며 “최근 사교육비 감소 추세는 경기불황으로 인한 착시현상일 뿐 사회 전반적 변화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역시 “지금의 40대가 50대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성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자녀가 한 명인 가구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세대”라며 “사교육비 대신 가족의 현재와 노후에 투자하는 일부 움직임에 심적으로 동조하면서도 ‘하나뿐인 아이’라는 생각에 경쟁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이도 상당수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임미진 기자 mijin @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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