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근혜 공약의 현실성 재검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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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근혜 당선인의 대선 공약을 실천하는 데 완급을 조절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미 지난해 말 이한구 원내대표가 시기조절론으로 운을 뗀 바 있다. 16일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약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우선순위를 정해 추진하자는 게 요지다. 경제상황, 재정형편, 실현가능성 등을 따져 시행시기를 조절하자는 얘기다.

 가장 큰 이유는 공약 실행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 때문이다. 특히 복지 공약들이 그렇다. 박 당선인은 불필요한 세출을 줄이고 세원(稅源)을 넓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론 불충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부가 추산한 박 당선인의 복지공약 실행예산은 새누리당 추산의 배에 달한다.

 또 처음부터 현실성이 떨어지는 공약도 있다. 18조원의 국민행복기금으로 가계부채를 최대 70% 탕감해 주겠다는 방안이나 하우스푸어, 렌트푸어를 지원하겠다는 대책에서도 현실성이 약한 내용들이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된 바다.

 물론 지킬 수 있는 공약만 내놓는 게 바람직하지만 우리 정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 표가 아쉬운 후보들의 공약엔 급한 마음에 서둘러 만든 것이 섞여 있을 수 있다. 박 당선인이 선거 전날 야간 유세에서 내놓은 군 복무기간 18개월 단축 공약이 대표적이다. 야당이 같은 공약을 내놨을 때엔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다 막판에 급하게 따라 한 것 아닌가. 이런 걸 모두 당장 실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론 공약의 100% 이행을 공언하고 있다. 완급조절이 자칫 국민과의 약속 파기나 기득권층의 음모로 비치는 걸 걱정해서인 듯하다. 하지만 국민생활과 재정에 직결되는 공약은 우선순위를 정해 차근차근 실행하는 게 순리다. 임기 중 반드시 마무리 지을 것, 틀만 잡고 다음 정부에 넘길 것, 그림만 그려 둘 것 등으로 나눠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기업·노사·공공부문의 4대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공공부문엔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100가지가 넘는 로드맵을 만들어 의욕을 보였지만, 다 마무리 짓지 못했다. 결과적으론 로드맵에 그친 것도 많았다.

 후보 시절 내놓은 그 많은 공약을 5년 임기 중 다 끝장내겠다는 건 의욕과잉이다. 공약을 폐기하거나 뒤집으라는 말이 아니다.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공약집 자체가 바이블은 아니다. 무리한 공약을 실현하려다 실패하거나 부작용을 빚는다면 그게 더 심한 약속 위반이다. 정책은 한번 시행되면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우선순위를 재검토해 합리적인 방향으로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정책의 효과도 제대로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