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 바둑' 조훈현에 대륙 침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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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화재배에서 거둔 조훈현9단의 승리는 그 원동력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중국 베이징(北京) 현지의 바둑계는 왕레이(王磊)8단의 결승전 패배 이후 침묵에 잠겨들었다.

조훈현은 분명 지쳐 있었고 50세의 노장에게 이 점은 치명적으로 보였다. 조9단이 한국의 젊은 신예들에게 연거푸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난해 중국 랭킹 1위에 올랐고 중국 리그의 영웅으로 떠오른 왕레이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조훈현9단은 마치 불타는 기차처럼 왕레이의 진영을 엄습했다. 큰 승부일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조9단의 기세에 왕레이는 혼백이 흔들리고 말았다.

13일의 1국이 조9단의 12집반승으로 끝나자 이튿날 중국의 일간지들은 "왕레이, 땀을 뻘뻘 흘리며 늙은 조훈현에게 무너지다"라고 썼다. "혼돈 속의 패배"라는 제목도 눈에 띄었다.

14일의 2국은 한국의 관계자들조차 왕레이를 응원하는 분위기 속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초반전부터 바둑은 흑을 쥔 조9단 쪽에 편하게 흘러갔다. 조9단이 자신의 장기라 할 침투와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판이 급류를 타게 됐는데, 이 와중에서 조9단이 판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후 조9단의 공격과 왕레이의 수비가 어지럽게 얽히며 쌍방에 위기가 오갔으나 최후에 먼지 걷힌 그라운드 위엔 조9단 혼자 부러진 창을 움켜쥔 채 서있었다. 조9단은 이번 대회 8강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더니 결국은 우승을 거머쥐었다.

과거에도 조9단은 기적적인 우승이 많았기에 관계자들은 "조훈현이란 사람은 귀신이 돕는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왜 매번 조훈현이란 사람만 운이 좋은 것인가. 운으로는 그의 승리를 설명할 수 없다.

조9단은 왕레이도 인정했듯이 전투력이 탁월하다. 이같은 실력과 운 외에 다른 것이 분명 있다. 그것은 아마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9단의 '기세'일 것이다.

큰 승부일수록 더욱 불붙은 기차처럼 돌진해버리는 조훈현의 기세가 다른 요소들과 어울려 항상 극적인 승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9단은 이기는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기자들이 조9단에게 물었다. "중국의 젊은 기사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조9단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리의 복잡성을 한마디로 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이징=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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