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풍경을 곁들여 마신다. 잊을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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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로 유명한 충청도 한산에서는 모시를 삼듯이 술을 빚는다. 바로 한산 소곡주다. 소곡주를 흔히 ‘앉은뱅이 술’이라고 하는데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목을 축이려고 주막에서 소곡주를 홀짝이다가, 저도 모르게 취해 일어나지 못하고 앉은뱅이가 돼 과거 시험을 놓쳤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술독을 열고 술맛을 보던 며느리가 술에 취해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도둑이 물건을 훔치다가 술독을 발견하고는 술을 떠 마시고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세 가지 일화 모두 무서운 얘기다. 물론 술맛을 과장하기 위해 꾸며낸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어쨌든 무서운 얘기다.

첫 번째 잔 - 내 ‘첫사랑’ 소곡주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을 펴낸 허시명씨는 인터뷰 장소에 술을 들고 나타났다. 종이박스를 열고 꺼낸 술은 바로 ‘소곡주’였다. 무서운 얘기를 들은 후였지만 반가움과 기대가 앞섰다. 병을 따는 그의 얼굴에도 술에 대한 기대가 묻어 있었다. ‘술 기행’ 책을 펴냈으니 전국에서 수 백가지 술을 마셔봤을 텐데도 그런 표정이 배어 나왔다.

허시명씨에게 소곡주는 의미가 깊은 술이다. 술 기행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소곡주였다. 아는 술 이름이라곤 소주나 맥주가 전부였고 술만 먹으면 속이 부대끼고 졸음이 오는 그였으니 술과의 만남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아이템을 몇 개 냈는데 그 중에 술 기행이 포함돼 있었어요. 아이템을 내는데 불길한 예감 같은 게 들었죠. 그때까지는 소곡주가 뭔지도 몰랐지. 그런데 술이 뭔지 알았으면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술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조금 익숙해져서 술을 먹어도 맛에 대해 말을 못하겠어요. 여러 가지 술을 처음 대했을 때, 그 첫 느낌을 되살리려고 많이 노력하죠.”

그는 ‘소곡주’를 첫사랑의 술로 여기고 있었다. 소곡주를 처음 마시고 취해 잠들었던 밤, 그는 이렇게 읊조렸다.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구나!”그는 ‘첫 사랑’ 소곡주를 한 잔 ‘꺾은’ 다음 본격적인 술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잔 - “다 걸러내면 맛이 없잖아”
허시명씨가 생각하는 우리 술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맛’이다. 일본의 청주와 극단적으로 비교되는 대목이다. 일본의 술은 향으로 승부한다. 몇 번씩 걸러내고 숙성해서 아주 깔끔한 맛을 만들어낸다. 허시명씨는 그렇게 깔끔한 술을 두고 ‘너무 단정하다’고 평한다. 좀 불완전하고 거칠거칠한 데서 제대로 된 맛을 느끼는 것이다.

“글 같은 것도 그러지 않아요? 불완전한 형태라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지요. 지금 전해오는 거친 느낌의 도자기들을 봐도 장인의 손길이 보이는 것 같잖아요. 술을 취재하다 보니까 거기에 사는 게 다 들어 있어요. 술 빚는 데 많이 빚어본 사람은 못 당해요. 숙성과정이 필요한 것도 그렇고. 술을 너무 많이 깎고 걸러내고 그러면 맛이 없어요. 우리 술이 향은 꾸리꾸리해도 맛이 있어요. 글을 쓸 때도 그런 맘먹고 썼죠. 너무 걸러내지 말고 맛나게 쓰자.”

술도가를 취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누룩을 보여달라고 해도 묵묵부답이고 밑술, 덧술의 비율을 알려달라는 질문을 던지면 내쫓기기 일쑤였다. 문배주를 취재할 때는 사장의 어머니를 붙들고 어렵사리 옛이야기를 끌어냈고 대부분의 술도가를 세 번 이상 드나들었다. 제조방법부터 재료의 비율과 첨가약재까지 알아내려니 한 두 번 방문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허시명씨가 이렇게 제조법까지 꼼꼼히 취재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대부분의 자료를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취재했어요. 이런 식의 기록이 후대 사람들이 더 좋은 술을 담글 수 있는 자료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진도에 가면 진도 홍주를 담그는 술도가가 50군데가 넘는데 대부분이 면허가 없어요. 우리 나라 주류정책은 주세를 걷기 위한 억압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술 전통을 잇기가 힘든 점이 많죠. 독일은 지방마다 동네마다 고유의 맥주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는 진도가 홍주를 마음대로 빚고 팔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홍주가 진도의 자랑이 되고 명주가 됐으면 싶다.

세 번째 잔 - 정말 잊혀지지 않는 그 맛
그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술맛이 있다. 바로 진도에서의 일이었다.

“진도에 가서 아주 좋은 밀주를 만났어요. 진도 홍주 문화재 지정된 할머니하고 같이 어떤 집에 갔는데 할머니가 가더니 ‘삘건 술 조, 삘건 술’하는 거야. 그 주인은 ‘없어요, 다 먹어버렸어’하대요. 주방에서 부인 목소리가 들리는데 ‘왜 그래, 좀 주지.’ 그러는 거야. 내가 여차여차해서 왔다니까 나를 술독 있는 데로 데려가요.

‘술을 주면 좋게 먹어야 되는데 저렇게 달라 그래 놓고 먹고 나서는 아따, 좋도 안한 술 갖고 아끼고 그래싸, 이런 얘길 하니까’ 술을 안 준다는 거예요. 술맛을 모른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간다고 나서도 술은 안 주대요. 달라고 그럴까, 아냐, 아냐 하다가 말할 틈을 놓치고 말았어요.

차를 몰고 나오는데 눈앞이 막 아른거리는 거야. ‘40도 증류주에다 1년 숙성을 시키고 산버찌를 따서 넣었다.’ 이 술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술 못 만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차 돌리자, 그래서 다시 들어갔지. 내 체면이고 뭐고 달라 그러자. ‘사장님, 저한테 술 한 병만 파세요’, 그랬더니 파는 술이 아니래. 그래서 ‘그럼 반병만 주세요’했더니 거절을 못하더라구. 근데 작은 소주병에 딱 반을 담아주더라구. 소주병 작은 게 어찌 그리 한스럽던지. 그 주인이 ‘이 술은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술이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더라구요. 그리고 소량이라서 더욱 맛있었겠죠.”

허시명씨는 진도에서 만난 그 술맛을 두고 ‘쉽게 잊을 수 없는 맛’이라 했다. 풍경과 술맛이 어우러져 있다면 어느 지방 어느 술인들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는『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에 실린 23가지의 술 말고도 한 권 분량의 글을 더 가지고 있다. 열심히 전국을 뛰어다니며 취재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술에 대한 자신이 없다. ‘과연 술이란 화두를 잡고 있을 때 내 인생이 풍요로워질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누룩이 술로 변하는 숙성의 과정을 사진에 담고 글로 풀어내는 그 작업이 자신을 숙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그는 마지막 잔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김중혁/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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