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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의 100년 전 제목, '너 참 불쌍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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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은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당대 민중의 지난한 삶을 파고든다. 장발장이란 불멸의 캐릭터도 빚어냈다. 톰 후퍼 감독의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 [사진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레 미제라블 열풍’이 거세다. 지난해 12월 19일 개봉한 영화는 4일 현재 누적관객 370만 명을 넘어섰다. 또 뮤지컬·연극·음반·DVD도 인기를 끌며 요즘 문화계 전반을 엮는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원작소설도 인기다. 민음사에서 내놓은 5권짜리 완역본 판매량이 출간 두 달 만에 10만 부를 넘어섰고, 펭퀸 클래식의 5권짜리 완역본 역시 한 달 만에 6만 부가 팔렸다.19세기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1802~85)가 집필해 1862년에 첫 출간된 『레 미제라블』이 15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21세기 한국인과 소통하고 있는 모양새다. 철학·문학 분야의 두 전문가에게 물었다. 『레 미제라블』의 식지 않는 매력은 무엇인가. 또 한국인은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장발장의 매력은 무엇

이탈리아 로마 그레고리안대 철학 석·박사. 그레고리안대 철학과 교수 역임. 저서 『메두사의 시선』 『철학 광장』 『서사철학』 등.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의 음악과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와 만든 영화이지만, 클로즈업이라는 영화의 특성 때문에 감동의 스펙트럼은 많이 달랐다.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머리를 잘라 팔고 이를 두 개나 뽑힌 팡틴의 얼굴이 카메라 줌의 진폭만큼 스크린에서 진동할 때, 관객의 심장도 더 이상 그 진동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울음을 들을 수 있었다. 이도 작품이 품고 있는 낭만적 열정 때문이리라.

 우리 각자에 내재하는 낭만적 열정이란 무엇보다도 ‘틀 지워진 삶에 대한 저항’이다. 그 틀이 정치·사회 구조이든, 경제의 원리든, 미학적 원칙이든,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다양성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산다는 것은 삶의 모양새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삶의 형식이 고착화된 틀로서 인간을 획일화하고 억압하려 할 때, 인간 심성에 잠재하는 낭만성은 언제든 꿈틀대며 때론 혁명의 기운으로 산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레 미제라블』의 장대한 서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편재하는 낭만의 특성은 각 개인의 다양한 욕구와 그것을 구체화하는 형식 사이의 관계다. 이러한 관계는 이성만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 그리고 세밀한 인간 감정으로 맺어지며, 미와 추, 생과 사, 빛과 어둠 같은 반명제를 해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공존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고의 서사시 같은 소설이 상상력의 힘으로 보여주듯이, 비참함 속에서 비극적 우아함이 꽃 피고, 그로테스크한 환경에서 천진무구한 어린 생명이 꿈틀대며, 악취 나는 하수구에서 숭엄한 인간미가 구원을 향한다.

 이 공존은 때로 혼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격정적인 혼돈의 세계에서 장발장의 삶은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삶이다. 이에 ‘낭만적(romantic)’이라는 말이 ‘소설(romance) 같은’이라는 의미를 내포함을 상기해봄 직하다. 그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불가능해 보이는 삶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한 개인의 고귀한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소설 같은’ 삶을 사는 장발장의 대척점에 기존의 질서에 지독하게 충실한 자베르 형사가 있다. 그는 법과 정의의 화신이다. 클로드 쇤베르그의 뮤지컬에서 자베르의 노래는 ‘법의 의미’를 열창한다. 그러나 ‘법과 사회질서의 적’ 장발장이 그에게 어처구니없게도 ‘천사 같은’ 충격적 태도를 보이기 전까지, 자베르는 그 소중한 법의 의미가 자신의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도 ‘법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지할 수 없었다. 아니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에게는 인생의 낭만이 너무 오래 동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과 정의의 질서 잡힌 틀은 역동적인 낭만에게 마취제다.

 본디 미학적 개념인 낭만은 의외로 정치·사회적 개념인 정의의 이면을 드러내 보인다. 정의는 조화의 개념과 밀접하다. 아니 그것을 바탕으로 하며 그것에서 유래한다. 서구에서 정의의 정치학은 조화의 미학 없이 발전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최적의 비례와 질서를 이루며 존재하는 상태를 조화로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 없이 고전적 사회 정의의 개념이 형성되기는 어려웠다.

 ‘모든 것은 조화로울 때 아름답다’는 조화의 미학은 대칭·비례·균형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고대로부터 발달하여 르네상스시기에 절정에 이른 미학의 대(大)이론이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면 내려오기 시작해야 한다. 르네상스 말기에서 3세기를 거쳐 위고가 활동하던 19세기의 낭만주의에 이르러, 아름다움이 더 이상 비례와 조화가 아니라 어떤 규칙 너머를 향한 열정과 긴장일 수 있다는 감수성이 발달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지 모른다.

 현대의 미학이 조화의 고전주의에 도전하듯이, 현대의 낭만은 전통적 법과 정의의 신념에 반성을 요구한다. 반면 질서 잡히고 조화로운 사회의 틀로서 정의 실현의 욕구는 종종 낭만주의자들의 이상을 향한 염원과 희생 그리고 방랑의 자유를 견디지 못하여 이를 삭제하려 한다. 하지만 낭만적 욕구와 열정은 우리 삶에서 해소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 대립이 극단에 이르면 피를 부른다. 『레 미제라블』은 이 변증적 긴장과 파국의 사태를 그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공동체적 삶의 필요조건으로서 정의에 대해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삶에서 정녕코 해소될 수 없는 인간미로서의 ‘낭만’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일러준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

한국인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서강대 국문학 박사. 저서 『』속물 교양의 탄생』 『한국문학과 개인성』.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 제목만 보자면 ‘불쌍한 자들’ ‘비참한 자들’의 이야기다. 아이 양육비를 벌기 위해 생니 두 개를 빼어 파는 팡틴과 범죄자라는 이유로 하룻밤 묶을 방 한 칸을 얻지 못하는 장발장. 이 비참함이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아마도 단지 비참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이 책이 조선에 처음 번역됐을 때 『레 미제라블』은 수난받는 자의 이야기였다. 제목도 『너 참 불쌍타』와 『애사』, 그리고 『장발장의 설움』 등이었다. 그런데 이 무정한 감정이 조선에서는 민족적인 이야기, 즉 ‘수난받는 자’ 설움과 슬픔의 이야기로 수용되었다. 그래서 그가 차별받으면 차별받을수록, 자베르의 시선이 냉혹하면 냉혹할수록 장발장의 ‘성공’에 더 열광했다.

 일본의 번역본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희! 무정(噫無情)』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무정하다!’이다. 조선과 일본의 경우 약간의 이점은 있지만, 『레 미제라블』의 역사적 의미보다 장발장의 파란 중첩한 이야기에 열광한 것은 매일반이었다. 심지어 일본판 역자인 구로이와 루이코는 빅토르 위고가 서문에서 ‘법과 제도를 넘어’ 역사의 빛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레 미제라블』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은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요즘 영화 ‘레 미제라블’을 둘러싼 사회적 반향은 사뭇 다른 듯하다. 영화 후반부에울려퍼지는 노래 ‘민중의 노래가 들립니까(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통해 원작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그만큼 ‘비참한 자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가 새로운 역사에 대한 의지와 지향으로 드러나고 있다.

 2013년 현재 많은 이가 이 책을 다시 붙잡는 것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수긍과 ‘그럼에도’ 이 현실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를 간절하게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원작 소설에서 읽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17년 동안 집필된 이 소설은 묵직하고 두툼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하기도 녹록하지 않다. 프랑스혁명 이후의 역사를 굽이굽이 파헤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왜 ‘소설’이 불가피한지 설득해내는 소설의 형식이다. 총 5부의 이야기에서 1부의 제목은 ‘팡틴’, 2부는 ‘코제트’, 3부는 ‘마리우스’이며 5부에 이르러서야 ‘장발장’이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또한 단수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격변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이다.

 실제 ‘장발장’조차 수없이 다른 인물들로 변신한다. 어머니는 ‘잔마티외’로 불렀으며, 아버지는 ‘저 장이란 놈’의 약칭인 ‘장발장’으로, 자베르는 ‘24601’번의 죄수로, 시민들은 ‘마들렌’ 시장으로, 마리우스는 ‘포슐르방’으로, 이처럼 장발장은 복수적 존재이다. 장발장의 존재가 그러하듯, 소설은 프랑스 격변기 속에 놓인 다수의 군중, 시민의 얼굴을 담아낸다.

 또 영화에서와 달리 소설 『레 미제라블』은 생각만큼 시민·군중·청년의 존재를 마냥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참한 현실을 이겨낼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과 그 현실을 냉소로서 버텨내는 허약한 환멸이 더 농도 짙게 그려진다. 프랑스혁명의 진취적인 기운은 미지의 심연 속에 갇혀있으며, 남아있는 것은 속악하고 비굴하게 타인의 것을 탐하는 인물군상뿐이다.

 청년들이 비참한 현실에 분노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가두를 점거하자, 시민들은 그 분노가 현재의 삶조차 허물어낼지도 모른다면서 창문조차 닫아버린다. 분노로 가득한 그 거리는 시민들에 의해 모두 닫혀버린다.

 바로 이 시점에 위고는 장발장의 ‘양심’을 역사의 빛으로 내놓는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신의 영혼을 대신하는 ‘양심’의 탄생이 그것이다. 마차에 깔린 자를 살려내고, 여공의 아이를 대신 키워내며, 죽음을 자처하는 청년을 구출하는 순간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두려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넘어서 고백하며, 분노를 넘어서 상생한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의 기운이 어떻게 인간 내면에 젖어 드는지를 역설해 낸다. 이 양심은 자베르의 ‘법’이 닿지 못한 세계이며 ‘법 너머의 법’이다. 이 세계를 엿보고자 하는 다수의 열망이 지금 다시 『레 미제라블』을 불러들이고 있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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