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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을 배우는 「파리장」|체불 이응로 화백의=동양 미 술학교 한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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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작년 봄 한국의 차가 고암 이응로 화백이 파리에 창설한 동양 미술 학교가 첫돌을 맞이했다. 파리 교외 이 화백의 집과 또 하나 도심지에 마련된 두 교실에는 지금 63명의 학생이 드나들고 있어 장소가 비좁은 형편이다.
9년전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각국에서 10여차의 전시회를 가진 이 화백은 서양 사람들이 동양을 너무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동양화를 통하여 동양을 인식시키고 특히 한국에 훌륭한 예술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데 학교 설립의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재래의 동양화를 가르치는 것 같지 않다. 학생들의 대개가 현대화한 동양화를 배우고 싶어하는 까닭에 신구가 조화된 새로운 시대의 동양화를 가르치고 있노라고 그는 밝혔다. 그것은 학생의 층을 훑어 봐도 짐작이 간다. 대략 4그룹으로 나눠 ①서양화의 노대가나 세계 화단의 일류 작가들 ②미술 학교 학생 ③은퇴한 노인과 가정주부 ④어린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린이와 취미 삼아 손에 익히려는 가정주부를 제외하곤 모두 미술의 전문가들이다.
학생 중 연세 높은 「리오타르」 (79세)씨는 당시 동양 박물관 고문이었던 분으로 이름난 건축가이기도 하다. 「베이로네·루시엔」은 프랑스 상원 의원이고, 입체파 화가 베코 여사며 추상화가 「베르나르」씨 등은 현역 예술가 중 쟁쟁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학생 중에는 멀리 남불에서 비행기 혹은 기차로 오는 사람도 있었으며 「디종」에 산다는 어떤 할머니는 한달에 2회 개인교수를 받기 위해 미리부터 여관을 예약하고 찾아와 많은 숙제를 준비해 가는걸 볼 수 있었다. 또한 40대의 한 미망인은 이 학교에 나오면서 인생관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우울하게 보내던 나날이 흰 화폭 위에 묵화를 치면서부터는 즐겁고 쾌활한 하루하루로 변했다고 했다.
30대의 청년 화가는 동양화의 기법을 탐내는 「칠레」인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한 여인은 건축가인 남편에게 도움을 주고자 동양화를 배운다고 자랑스레 대답했다.
이 학교의 교과 내용은 붓의 위치와 선, 먹물의 변화 및 종이에 따른 효과, 그리고 동양화 나름의 구도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문인화·기물절기·산수·서예에 이르기까지 동양화 전반의 상식을 가르치고 있다. 다만 교과서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이 화백은 토로하면서 이 학교를 키우고 좀더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한국미술을 중심으로 하여 엮은 교재가 필요하다고 다짐했다.
그가 미술의 수도라고 부리는 파리 한복판에서 유력한 후원자를 얻어 학교를 운영하고 학생이 날로 늘어가는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닐까. 지금 파리 현대미술관이 개최한 「콩파레종 66」에 출품하고 있고 또 미국과 서독에서 개인전 초대를 받고 있는 그는 어느 유파에도 집어넣을 수 없는 독특한 기법 때문에 「그 자신이 개척한 구성과 구도」에 파리의 화가들이 반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파리=장덕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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