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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운영의 변질과 타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번 임시국회는 추경예산안을 다루는 과정에 있어서 심한 변질·타락의 상태를 보여 주었다. 재경위는 추예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예결위는 5인 수권소위안을 이 역시 날치기로 통과시켰는데, 야당이 농성투쟁을 벌여 본회의장을 사용할 수 없게되자, 공화당은 회의장소를 옮겨 자기네들만이 모여서 추예안의 예결위 통과를 강행했다.
야당 의원들이 계속하여 농성투쟁을 벌여 경호권을 발동치 않고서는 국회본회의를 열 수 없게 되자, 여·야는 극적으로 협상의 실마리를 찾아 추예안의 예결위 통과를 인정해 준다는 조건으로 금차 국회의 문을 닫고 4월 1일에 임시국회를 열어 추예안을 다루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처럼 여·야가 극한투쟁 일보직전에 있어서 극적인 타협을 보아 격돌을 면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날치기 통과와 농성전술이 맞서 추예안을 소홀히 취급했다는 것은 우리 헌정사상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기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국회 운영의 변질·타락에 대해 깊은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원내 의석으로 보아 3분의 2선에 가까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있는 공화당이 재경위에서나 예결위에서 안건 심의를 변칙적으로 다루고 날치기로 통과시켰다는 것은 다수당의 자신상실을 입증하는 동시에, 집권당이 의회정치가 요구하는 근본적인 「룰」을 존중할 성의가 없음을 말하여 준다. 대체 1백77억원의 추예안을 회기말을 불과 며칠 앞두고 국회에 상정, 심의했다는 것부터가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경시하는 허사라 볼 수 있다.
하물며 이 사건을 상정시켜 놓고 여당의 심의와 발언을 봉쇄시키기 위해 재경위로 하여금 날치기 통과를 강행케 하고 수정심의기간을 줄이기 위한 5인 수권소위안을 예결위가 이 즉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는 것은 법적으로 허다한 의문을 남기는 것이요, 정치도의상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허사인 것이다.
추예안을 집권당만이 모인 예결위에서 통과시키는데 있어선 회의장소를 급작스레 옮겨 야당의원들이 참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전격적인 통과를 강행했다는데 이르러서는 아연실색, 감히 무엇이라 평하기조차 곤란하다. 국회란 국회의원이 회의 개최의 정족수만큼 모이면 성립되는 것이요, 반드시 국회의사당을 회의장소로 사용해서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법이 없다는 논이 성립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당이란 의회정치를 상징하는 존엄한 장소요, 또 환장의 선례를 시인하면 앞으로 집권당의 의원부총회를 가지고 국회로 대체한다는 주장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천재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국회 회의는 반드시 국회의사당에서만 열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만부득이 회의장소를 옮기는 경우에 있어서는, 회의 개최 24시간 전에 그 사유를 모든 국회의원에게 통고하는 제도를 법적으로 명문화해 둘 필요가 있다.
의회정치 운영에 있어서 소수파가 지연전술, 농성전술, 퇴장전술을 쓴다는 것은 분명히 변칙적인 것이지만 다수파의 횡포 강압을 견제키 위해서는 이런 평단의 사용이 필요악으로서 시인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우세한 다수파가 날치기 표결이나 환장회의 등 변칙적인 방법을 가지고 소수파를 기만하고 우롱한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인내와 관용이야말로 다수당에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미덕이다.
이런 덕성 위에서 국회를 운용할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안건을 자당의 의도대로 통과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의회정치의 본질적인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집권당이 이런 폐풍을 버리고 강자다운 너그러움을 보여 모든 안건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나갈 것을 강력히 요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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