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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야스쿠니 방화, 한국 법정에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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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제 어머니에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대신 복수하기 위해 제 아들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고법 403호 법정. 나이 지긋한 중국 여성이 증인석에서 울먹이는 동안 한국어 통역이 이어졌다. 녹색 수의(囚衣) 차림의 남자는 눈시울을 붉힌 채 증인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방청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류창에게 상을 줘서 돌려보내 주세요.”

 중국인 류창(劉强·38)은 지난해 12월 26일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입구 기둥에 불을 지르고 한국에 입국한 뒤 다음 달 8일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지다 체포됐다.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지난달 초 형기를 마쳤지만 일본 정부의 범죄인인도 청구로 다시 수감된 상태다. 이후 서울고법 형사20부(황한식 수석부장판사)가 재판을 진행해왔다.

 이날 증언을 위해 서울에 온 류창의 어머니 정루메이(鄭如妹·64)는 자신의 어머니 양잉(楊英·1986년 사망)이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끌려간 한국인 위안부 이남영이라고 말했다. 45년 항일전쟁 때 전사한 류창 할아버지에게 중국 정부가 수여한 ‘혁명열사 증명서’도 증거로 제시됐다. 뒤이어 변호인과 검찰 측이 최종 의견을 밝혔다.

 변호인:류창이 일본 군국주의와 전범을 미화하는 상징물 야스쿠니에 방화 흔적을 남긴 건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정치적 목적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일본으로 넘길 경우 ‘뺨에 키스를 하거나 죽이거나’라는 류창의 말대로 가혹한 형량이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검찰:한번 예외를 만들면 법과 원칙은 회복되기 힘들다. 과거사 문제는 방화와 같은 폭력적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방화를 하고 출국한 뒤 정치범이란 주장을 펼 수도 있다. 범죄인인도조약은 상대 국가(일본)의 사법제도가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맺은 것 아닌가.

 류창은 최후진술에서 “같은 피가 흐르는 재판장께서 외할머니와 저의 분노를 이해해주시고 정의를 실현시켜달라”고 호소했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중국·일본 취재진과 대사관 관계자들은 조용히 재판 내용을 노트북에 쳐 넣거나 수첩에 적었다. 일본과 중국 정부는 류창의 신병을 서로 자기 쪽에 넘기라고 한국 정부를 압박해왔다. 다음은 양측 인사를 만나 취재한 내용이다.

 일본 측 인사:방화는 사상자를 낼 수 있는 중대 범죄다. 방화 말고도 정치적 신념을 표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이 중국과 정치적 딜(거래)을 할 것이란 우려가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우리는 한국의 법치주의를 믿는다.

 중국대사관 관계자:일본이 우경화하는 상황에서 류창이 일본에 넘겨지면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 단순 형사범이라면 일본도, 중국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입장은 한·중이 같지 않은가.

 양측 모두 “법대로, 조약대로 해달라”는 것이지만 결론이 나오면 어느 쪽이든 반발하고 나설 태세다. 현행 범죄인인도법과 한·일 범죄인인도조약을 보면 ①정치적 범죄이거나 ②차별적 처우를 받을 우려가 있거나 ③인도적 고려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 인도 거절 사유에 해당한다. 이 중 ②와 ③은 답이 되기 어렵다. 극우 성향의 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행정부에서 독립된 일본 사법부가 불공정한 재판을 할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려야 하는 건 ①정치적 범죄로 볼 수 있느냐다.

 이번 재판엔 동북아의 근현대사와 외교관계, 국민정서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한국(박근혜), 중국(시진핑·習近平), 일본(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새 리더십이 동시에 등장하는 가운데 분쟁의 불씨가 될 소지도 있다. 곤혹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한국 법원의 수준을 세계에 알릴 기회다. 그러기 위해선 외교적 셈법이나 정서적 접근을 넘어 오로지 법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결정 시한은 내년 1월 5일까지다. 류창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가 될까. 동북아 3국의 총성 없는 전쟁터 위를 가르는 명쾌한 결정문이 나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