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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은요" 20대 박근혜, 27년뒤 또…충격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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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30분 청와대. 당시 27세 박근혜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깬다. 잠시 후 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알렸다. 이어 뒤에 ‘10·26’으로 알려질 사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박근혜는 불쑥 “전방엔 이상이 없나요”라고 물었다. 방금 아버지의 총격 사망 소식을 들은 딸의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전방은요”라는 이 말은 27년 뒤인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 유세 중 ‘신촌 면도칼피습’으로 수술을 받은 뒤 “대전은요”라고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가 유난히 강인해서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박당선인에겐 50여 년에 걸친 ‘북한 생각’ 형성 과정이 있다. 그의 북한관은 청와대, 야인, 정치인에 걸쳐 형성기-유지기-변화기를 겪는다. 대체적으론 50~60대가 그렇듯 ‘보수적’이지만 농도에 굴곡이 있다. 그의 일기, 관련 서적, 당시 관계자를 통해 ‘박근혜의 북한 생각’을 짚어본다.

북한이 당선인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어머니(고육영수 여사)가 아버지의 오래된 군복 바지를 줄여 내게 입히곤 하셨다. 깡충 짧은 바가지 머리에 국방색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은 어린 눈으로 봐도 촌스러웠다. 나는 그걸 입는게 너무 싫었다”라고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에 썼다.

북한이 소녀 박근혜를 괴롭힌 셈이다. 북한 경험은 띄엄띄엄 이어진다. 성심여고 시절인 68년,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하려 했던 1·21사태도 충격을 줬다. 당연히 반북 정서가 형성됐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 소녀, 당시 그 나이 또래들처럼 북한관은 단편적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어머니의 사망이다. 당시 프랑스에 유학 중 황망히 돌아온 박 당선인은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쉬지 않고 울었다.온몸의 뼈마디가 저려오는 듯했다… 배후에 조총련이 도사리고 있으며 북한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었다”고 회상했다. 반북을 넘어 북한은 원수가 됐다. 75년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통해 북한관은 강화되고 역할도 깊어진다. ‘근혜-카터 회담’은 좋은 사례다.

청와대 시절

75년 월남의 패망·공산화에 이어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지상군 철수 방침을 정하자 한국은 ‘북한 남침’의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국력이 북한에 미치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 79년 6월 29일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다. 카터는 국빈 예우도 마다하고 동두천의 2사단 캠프로 가서 첫날을 잤다. 박 대통령의 인권 탄압에 대한 경고였다.

다음날 정상회담에도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박 대통령이 두 시간 반의 정상회담에서 45분간이나 철군 반대론을 설명하자 카터는 밴스 국무장관과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박이 계속 이런식으로 나온다면 미군을 다 철수시키겠다” 는 메모를 보냈다(돈 오버도퍼의 ?투 코리아?). 냉랭한 분위기는 언론에도 드러난다.

중앙일보 79년 6월 30일자는 ‘정상 간에 솔직한 대화가 있었다’고 썼다. 이는 ‘거친 회담’의 외교적 표현이었다. 박-카터 1차 회담이 그렇게 끝나자 박근혜가 카터 대통령의 조깅을 대화 소재로 부인 로절린 여사에게 말을 걸었다.

박근혜=“조깅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그런데 방금 수술한 사람이나 몸이 아픈사람은 안 되겠네요.”

로절린=“네, 섣불리 하면 해로울지도요.”

박=“국가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지금 한국은 북한 남침으로 폐허가 된 지 얼마 안 됐고,지금도 북한은 남침을 노리고 있습니다. 간첩을 보내고 땅굴을 파고 특공대를 보내 청와대까지 습격했습니다.”

로절린=“그 정도인가요.”

박=“아픈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처럼 조깅하라면 건강을 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이 대치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 발전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는 한국은 다른 나라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로절린=“그 얘기를 대통령께 전할께요.”

만찬 자리에서 카터 대통령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고, 만찬 내내 박근혜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근혜-카터’ 회담이란 우스개말이 나왔다. 곧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철회됐다(이상 박근혜의 자서전 인용, 재구성).

후에 로절린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와의 대화를 카터 대통령에게 전해 문제를 푸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박 당선인은 저서에서 “그런 외교적 수완은 국빈 방문 때 퍼스트레이디를 하면서, 또 간간이 아버지를 통역하거나 수행 차량에 함께 타서도 배우고 밥상 대화를 통해서도 배웠다”고 썼다. 여동생 서영(옛이름 근영)도 94년 7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언니와 외교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론 그 정도가 아니었다. 74~79년 부총리를 지낸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매주 목요일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 안보회의가 있었어요. 관계 장관들이 소관 분야안보 정세를 보고했는데 거기에 어린 박근혜가 있었거든. 의견은 내지 않고 가만히 앉아들었지요.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뒤 박 대통령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에요. 나도 박근혜가 대통령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는데 그래서 안보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지. 총명하니까… 대통령 다음으로 안보상황을 잘 알게 됐어요. 방위산업도 전부는 몰라도 어깨 너머로 알게 됐고…”라고 했다. 요즘 대학생 인턴을 시작할 22세부터 27세까지 대통령을 위한 사전 수업을 받은 셈이다. 그런 게 바탕이 돼 “전방은요”라는 통치자 수준의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실제로도 간단치 않았다. 10. 26 이틀 전인 24일 존 위컴 주한 미 사령관은 “북한이 항공기 1100대, 함정 450대를 보유해 한·미 연합전력보다 우위”라고 말했고, 다음날인 25일엔 문화공보부 대변인 명의로 “북한은 한국 내 일부 소요사태에 오판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그때 부산·마산은 군이 투입될 만큼 반유신 시위가 심각했고, 마침 25일은 목요일로 안보장관 회의가 있는 날이다. 당시 박근혜는 북한을 심각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 당선인은 그런 경험을 언급하지 않아 왔다. 80년 2월 4일 “지도자가 속도 없이 자비한 척하다 많은 사람이 도리어 희생된다. 1급 기밀까지 모두 보고되는 이유도 정보를 잘 듣고 판단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라고 일기에 슬쩍 비치는 정도였다.

야인 시절

청와대를 떠나 평범한 야인이 된 박근혜의 대북 인식엔 큰 변화가 없었다. 북한 관련 뉴스가 있을 때 남긴 일기의 단상들이 이를 보여준다. 90년 6월 21일 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 재개를 제의하자 그는 ‘최근 여론조사에 주한미군 철수 반대가 84%쯤 된다’고 썼다.

6월 24일에는 ‘한반도에는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국민이 61% 이상이라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하물며 70년대 초기야! 북한 노선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았다고 믿는 사람도 50%가 넘는다’고 썼다. 이날 북한 출신 소련파 18명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소련 주간지 ‘모스크바 뉴스’가 ‘6·25는 스탈린 명령으로 북한이 도발했다’ ‘북한이 독가스를 대량 비축하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91년 10월 10일엔 ‘평온·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 모른다’고 썼다. 이날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냉대를 받았다는 내용, 6·25를 스탈린이 부추겼다는 당시소련 극동군 사령관 참모의 증언 같은 보도가 있었다.

정치인 시절

당선인의 북한 인식 변화는 2002년 북한 방문이 계기였다. 결심 전 그는 ‘북한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어머니가 북의 사주를 받은 총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기습하기 위해 북에서 보낸 특수부대가 청와대 바로 앞까지 왔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모습을 보아 왔다’고 회상했다. 북한은 여전히 원수였다.

그럼에도 ‘이제 과거의 아픔과 기억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아픔을 겪은 나이기에 남북관계를 가장 잘 풀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북한방문길에 나선 그에게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특별기를 보냈고, 단독 회담도 했으며 판문점 귀환도 배려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박 당선인은 “북에 다녀온 후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 발전적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뢰 중시’라는 자신 인생관의 연장선이다. 한 관계자는 “2002년 평양 방문 때 김정일이 박근혜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거기엔 ‘박근혜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박근혜의 대북 인식이 변화의 언저리에 서게 된 것이다.

이후 2005년 미국 방문길엔 북핵 해결을 위한 ‘밥상론’도 제시했다. ‘단계적으로 하지 말고 한 상에 다 올려놓는 한국 밥상처럼 모든 걸 올려놓고 포괄적으로 타결하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2007년 그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제는 북한 변화, 북한의 선군 정치 폐기”라고 말해 여전히 ‘이명박보다 더 오른쪽’으로 평가됐다.

좌파는 그를 ‘평화통일이라는 숙제를 풀어가는 데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규정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그는 북한과의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말했고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북한을 언제라도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신뢰 중시’라는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반북·보수에서 개량적 보수로의 이동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이 쏜 미사일로 실천 시점은 멀어졌다. 당선인의 외교안보 핵심 브레인인 윤병세 단장은 “당선인의 북한 생각은 확실히 진화하고있다. ‘안보도 튼튼히 하면서 유연한 대화에도 무게를 둔다”며 “그런데 북한의 미사일이 악재가 됐다”고 말했다.



참고서적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남송, 1993)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부산일보 출판국, 1998),
『나의 어머니 육영수』(사람과 사람, 2000)
『(자서전)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위즈덤하우스, 2007)
『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북포스, 2005)
『박근혜 일기』(동동, 2012)
『박근혜, 무궁화 꽃이 필 때』(리전, 2012)
『박근혜의 거울』(시대의 창,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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