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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임신부야!" 매장서 난동 30대女, 알고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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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신세계백화점이 ‘생떼 정여사’ 퇴출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도를 넘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과 제품에 하자가 있어 피해를 본 고객을 분류해 체계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상습적이고, 직원에 대한 욕설이나 폭행 등 그 정도가 심각할 경우엔 법적인 대응도 강구하기로 했다. 그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악성 고객으로 인한 폐해가 두고 볼 수 없는 선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신세계는 이에 따라 최근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다. ‘매장 직원을 징계하거나 해고하라고 요구하면 협력회사 직원 징계나 해고는 권한이 없다는 것을 이해시켜라’, ‘매장에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소란을 피우면 고객과 사원 보호를 위해 비상 연락체제를 가동하고, 사진·동영상 등 민형사상 대응을 위한 입증자료를 확보하라’ 등이다. 신세계의 이 같은 방침은 한 달 100여 건의 악성 항의에 충격받아 퇴사하는 협력회사 사원이 늘어나는 등 인적 자원에 대한 피해가 커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영업전략담당 이재진 상무는 “악성 고객 컴플레인으로 인해 판매와 응대의 접점에 있는 협력 사원들의 스트레스 정도가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달했다”며 “이들과 선의의 고객을 나눠 적극 대응해야 대다수 고객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매뉴얼을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신세계뿐 아니다. ‘블랙 컨슈머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줬던 기업들이 변하고 있다. 금전적인 손해가 커지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정신적 피해까지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83%가 블랙 컨슈머로부터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다. 지난 9월 서울 명동의 의류업체 매장에 찾아온 30대 초반 여성은 “이곳에서 구입한 티셔츠를 입었더니 몸에서 땀이 나고 뱃속 태아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며 “2000만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물이 빠져 다른 옷이 엉망이 됐다”고도 했다. 매장 직원이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하자 “너 몇살이냐”며 머리채를 잡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 여성은 해당 매장에서 티셔츠를 산 적 없고, 임신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경우다. 하지만 블랙 컨슈머들이 늘어나면서 기업들은 ‘순응’에서 ‘강력 대응’으로 방침을 바꾸고 있다.

 GS홈쇼핑은 지난 7월, 사은품이나 보상을 노리고 상품의 반품·교환을 계속하는 블랙 컨슈머들에게 향후 주문을 받지 않겠다는 우편물을 발송했다. 회사 측은 “거래 금액과 취소 횟수 등을 보고 결정하지만, 정확한 기준은 밝힐 수 없다. 다른 고객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하는 분들에게만 부득이하게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블랙 리스트에 오른 블랙 컨슈머들이 주문전화를 걸면 상담원이 “죄송하지만 주문을 하실 수 없다”고 안내하는 방식이다. 욕설이나 항의를 할 경우에는 자동응답 전화로 돌린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직접 콜센터 직원 보호에 나섰다. 올해 초 “콜센터 직원에게 성희롱 발언이나 욕설을 하는 고객 전화에는 계속 응대할 필요가 없다”는 지침을 발표했다. 이런 발언을 한 고객들에게는 두 차례 경고 안내 음성을 틀고, 그래도 계속할 때에는 전화를 끊도록 하고 있다.

 기업 이미지에 금이 갈까 한때 ‘무조건 현금 보상’을 내걸었던 제조업체들도 달라졌다. 지나친 보상 요구엔 법적으로 대응하고, 기준을 넘어서는 현금 및 현물 보상은 금지한다는 원칙이다. 라면업체 팔도는 블랙 컨슈머에 대해 ‘법적으로 해결한다’는 내부 기준을 세우고, 미리 상담 시 보상 기준을 공지하고 있다. 계속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면 재차 ‘소비자 분쟁 해결 기준’에 따른 적정한 보상 범위를 설명하고, 법적으로 조정된 판례들을 알려준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는 교환·환불 및 소비자 보상 기준을 홈페이지에 명확히 고시해놓고 있다. 상담전화가 오면 홈페이지에 있는 고시 시준을 설명하고, 그중 어디에 해당하는 경우인지 확인해주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의류업체 C사도 1년 전부터 ‘현금 보상은 없다’는 걸 원칙으로 세웠다. 대신 해당 지역의 매장 매니저가 고객 요청 시 몇 번이고 고객 자택을 방문해 사과하고, 사은품 정도를 덤으로 증정해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회사 측은 “서울에 있는 브랜드 매니저가 부산까지 서너 번 찾아간 경우도 있다”며 “돈으로 불만을 막으면 당장은 더 편할 수도 있지만 향후 블랙 컨슈머들의 타깃이 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식품업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은 블랙 컨슈머들에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현금·현물 보상을 해준다. 분쟁 해결이 오래 걸리는데 그동안 블랙 컨슈머들이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얘기를 퍼뜨리면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한 식품업체의 고객서비스팀장은 “법과 제도가 인터넷·SNS를 따라오지 못하는 측면이 크다. 이물이나 제품변질 같은 사안은 법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다 한들 한번 소문이 퍼지면 타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다”고 털어놨다.

 소비자 단체들은 소비자를 무조건 ‘블랙 컨슈머’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박현주 소비자원 책임연구원은 “블랙 컨슈머와 본인의 권리 주장을 강하게 하는 소비자는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며 “정당한 권리 행사를 하는 소비자들과의 소통엔 기업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영·조혜경 기자

유형별 블랙 컨슈머

● 과도한 보상 요구형
- 정신적 피해 보상, 매장 직원 해고 요구

● 무조건 교환 환불 요구형
- 고객이 과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 파파라치형
- 악의적 민원 제기, 인터넷 허위 사실 유포 등

● 업무 방해형
- 매장에서 무례한 언행, 폭력 행사 등

● 협박·위협형
- 유력인사 거론하며 위력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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