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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이윤택 작·연출 시골선비 조남명

중앙일보

입력

초야(草野) 의 연극쟁이 이윤택이 세상에 고할 상소문을 들고 상경했다. 그가 쓰고 연출한 연극 '시골선비 조남명'은 그 상소문의 전말이다.

이 신작은 올해로 탄생 5백주년이 된 조선 중기의 거유(巨儒) 남명 조식(1501~70) 의 삶을 다룬 역사극. 그 흔한 일대기 수준을 결코 지향하지 않으면서, 한 '선비'의 대쪽같은 삶을 유희(遊戱) 적인 기법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이윤택은 남명의 삶 중 작은 곁가지들은 과감히 절단하고 한가지 주제로 응축해 집요한 작가정신을 드러냈다. 오늘날 유효 적절한 물음인 '지식인의 책무'가 바로 그것으로, 얄미울 정도로 예민한 이윤택의 시대감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연극은 딸깍발이 '산중 독서인'(1막) 조식이 '세상과 만나'(2막) 고, 드디어 을사사화를 지켜보며 죽을 각오로 상소문을 올리는 것(3막) 으로 꾸며졌다.

"지금 배운 자들이 사라졌으니 세상의 중심이 없어졌고, 나라 일이 그릇되어서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극 마지막의 상소문은 '지행합일(知行合一) '을 좌우명으로 살았던 한 고결한 선비의 외침이자, 분명 이윤택의 감정이 이입(移入) 된 클라이막스다.

이런 반전을 통해 평생 '세상에 나를 맞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나를 요구하지 않는 것인가'로 일생을 고민한 조식은 익명의 역사에서 걸어나와 당당히 현재와 만난다.

이윤택은 자칫 관념적인 '의식화'로 치달을 위험성(특히 어떤 '기념'공연일 경우 더하다) 을 시종 발랄한 연출술로 피해간다.

선비의 품격을 고양시켜주는 지름시조의 단아한 창(唱) 과 격있게 음풍농월하던 선비들이 추는 양반춤, 그리고 조식이 토정 이지함을 만나 한 수 깨닫는 대목에서 김지하의 대설 '똥바다'를 인용해 펼쳐보이는 마당극 등에서 그런 재치가 엿보인다.

몇해 전 서울을 떠나 경남 밀양으로 훌쩍 떠나 연극촌을 꾸며 살고 있는 '문화게릴라' 이윤택. 이번 작품은 그가 시골생활에서 '격조 있는 대중극'의 가능성을 깨달은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좋은 징조를 보여주는 사례다.

14일까지 동숭홀.02-909-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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