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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톱에 생채기가, 퉁소소리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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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새 대통령이 당선됐다. 아침 공기가 왠지 어제와는 달라졌다. 선거제도가 정착되면서 우린 제 생각을 대변할 리더를 골라내는 판독기를 마음 안에 내장하기 시작했다. 힘겨운 정치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그 판독기는 줄곧 업그레이드됐다. 돈 세는 기계처럼 정교하게 파드락거리며 수천 개의 목록을 순식간에 감별해낼 줄 안다. 새 당선인은 치밀하고 치열한 테스터를 통과했으니 일단은 축하할 일이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생각하면 대통령에 뽑혔다는 건 엄청난 과제를 온몸으로 이고 지고 폭풍 거센 허허벌판으로 나서는 셈이다. 그토록 힘겨운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의아할 뿐이지만 어쨌든 당선인은 이제 차근차근 차기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새 당선인에게 몇 마디 할 말이 있다. 낙선한 분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이다.

 통합과 소통은 이번 선거의 메인 구호였다. 단어는 조금씩 달랐지만 양쪽 다 비슷한 슬로건을 내걸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원하는 리더의 자질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말들은 선거 과정에서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원래의 싱그러운 의미가 탈색하고 증발해버렸다. 소통과 통합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함께라야 가능하다. 특히 선거에서 진 쪽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진 쪽이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이긴 쪽이다. 당선에 환호할 게 아니라 지난 경험에서 답을 찾고 역사에서 지혜를 구하는 것이 시급하다. 당선 후에도 끊임없는 소모전과 부질없는 미움으로 서로를 황폐하게 만들어선 큰일 난다. 그런 일을 과거에 하도 많이 봐와서 지레 불안하기 짝이 없다.

 올해 친구들 몇몇과 주역 계사전을 함께 읽었다. 뜻이 크고 멀어 알아듣지 못할 말도 많았지만 오히려 크고 멀기에 단순하고 명료한 구절도 많았다. 거기 자주 등장하는 말은 ‘길흉회린(吉凶悔吝)’이었다. 원래 ‘길회린흉’인 것을 대구와 리듬을 살리기 위해 배열을 바꿔놓은 것이라는데(해석은 사람마다 제각각일 수 있다!) 길과 흉 사이에 바로미터처럼 놓인 것이 ‘회린’이라고 했다. 즉 후회해서 성찰하면 길(吉)하고 인색해서 닫아두면 흉(凶)하다는 것인데 더 적극적으로는 인색한지 아닌지를 늘 돌아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인(吝)’이란 물질에 인색한 것도 해당하지만 본질은 마음을 꼭꼭 닫아걸고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혼자 잘나서 기고만장한 것이다.

 사람은 사자와 호랑이처럼 홀로 어슬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개미와 벌처럼 사회를 이루고 사는 존재, 암만 외딴 집에 홀로 살아도 건너편 반짝이는 불빛에 의지해야 가슴에서 온기가 스며 나오고 그걸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소통하지 않고 마음과 몸을 꽉 닫아걸면 흉할 수밖에! 인간은 모름지기 타인과 소통해야 하고 자연과 소통해야 하고 우주만물과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고 길하다! 그걸 수천 년 전 선지식이 네 글자로 간결하게 축약해둔 것이다. 부러진 제비 다리를 꼭꼭 처매준 흥부는 새들과 소통할 줄 알았기에 길했다. 그가 놀부처럼 가진 게 많았다면 새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린 그동안 너무 열심히 달려왔다. ‘열심’은 글자 그대로 심장을 과열되게 만든다. 그래서 다들 피로하고 바쁘다. 여유가 없다. 새 대통령은 이 과열을 좀 내려놓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경쟁하지 않아도 손해보지 않는 세상을, 돈이 많지 않아도 억울하지 않은 세상을! 그러면 곁에 선 사람의 발톱에 난 생채기가 보일 것이다. 아픔을 참아온 사람의 마음 안에서 울려 나오는 퉁소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웃의 생채기를 못 보고 퉁소소리를 못 듣는 세상은 길한 운명을 맞기 어렵다.

 눈 밝고 귀 밝은 수천만 네티즌이 무소부재한 하느님이 되어 언제든 대통령을 지켜볼 것이다. 청와대 안에 갇혀서 ‘인’하면 우리 마음속 데이터는 재빠르게 작동해 ‘흉’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니! 오늘 기쁨에 빠진 당선인이 5년 후의 ‘길흉회린’을 동시에 판독할 수 있기를 빈다.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